물론 나는 러시아가 좋지만, 누군가에겐 별로 재미없고 낯설기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러시아에 우리들의 중요한 인적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좀 다르지 않을까?
200여 년 전 러시아라는 낯설고 광대한 땅에 건너간 우리 동포들이 있다.
그들에 대한 동질감과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러시아가 심적으로 한층 가까운 느낌이 들 것 같다.
(출처: 노컷뉴스)
내게도 전환점이 있었다. 노컷뉴스 인턴기자 활동 당시, 교육 프로그램 참여 차 한국에 온 고려인 드미트리를 인터뷰하고 나서다. 들어본 적 없는 '사마라'에서 왔다던 그는 외모로는 전혀 이질감이 없었지만, 한국어는 잘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 할아버지의 고국인 한국에 대한 애정은 가득했다.
그간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왠지 고려인에 대해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역사 속 시대적 요구나 어려움으로 해외로 건너간 우리 한인 '동포'.
러시아에는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재러 동포들이다.
현지에서 부르기로는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까레이쯔(корейцы)'.
많은 사람들이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을 혼동하거나 동일하게 여긴다.
하지만 엄밀히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은 역사적 배경부터 다르다.
고려인은 누구인가?
고려인은 조선말,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 후손으로 지금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고려 사람(Корё сарам)'이라 칭한다.
고려인과 조선족을 같은 민족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족은 중국 지역 동포로 출신이 다르다.
농사 지으러
1863년 함경도 농민 열 세 가구가 러시아로 건너갔다. 그렇게 한인의 연해주 정착은 시작됐다.
문헌에는 고려인들의 출발점이 된 곳, 포시에트의 한인 마을 '지신허'가 1864년 등장한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강화하면서 국경은 막히고, 워낙 땅이 척박해 농사가 어려운 함경도 농민들은 더는 먹고 살기 어려워졌다. 거기에 기근과 전염병까지 돌자, 급기야 두만강을 건너 국경을 넘어가게 됐다.
러시아로 건너 온 근면성실 한인들은 동토를 농지로 일구며 살았다.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자, 러시아는 한인들의 현지 정착을 도와줬고, 그렇게 이주민은 점차 늘기 시작했다.
이처럼 초기 이주민은 조국 땅의 기근에서 벗어나려 국경을 넘은 북한 출신의 농업 이민자가 대다수였다.
블라디보스톡 요새 박물관 내 20세기 초 현지 한인 마을 사진
항일운동 하러
하지만 을사늑약(1905) 이후로는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망명 이주자들의 비중이 높아졌다.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최재형을 비롯해 교과서에 나온 그들, 안중근, 이상설, 이동휘, 이범윤 등 다수. 블라디보스토크의 초기 '한인 마을(구한촌)', 그리고 '신한촌'이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다.
초기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마을(구한촌)'이 형성된 거리는 당시 실제 이름이 '한국 거리'였다.
놀랍게도 그곳은 현재 아르바트 거리와 스포츠 해안로 사이, 한국 관광객들이 점령한 '빠그라니치나야 거리(국경 거리)'이다. 현 디나모 경기장 자리에 한인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은 1911년 러시아 정부가 콜레라를 빌미로 한인들을 쫓아내 사라지고,
쫓긴 이들은 시내 북부 언덕진 곳으로 가 독립운동의 거점 '신한촌'을 조성했다.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거리(ул. Корейская) 모습. 現 빠그라니치나야 거리(ул. Пограничная). (출처: Primamedia)
강제로 열차에 실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고 이어 내전이 이어졌다.
당시 일본은 백군, 즉 러시아 황제의 세력을 지지했고, 이를 기회 삼은 일본군은 연해주로 들어와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우리가 1920년 4월 참변 사건으로 기억하는 일들이다.
이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소련까지 압박해왔다.
당시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일본에 위협을 느꼈다. 이에, 일본인과 비슷한 외모의 조선인이 스파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1937년 연해주에 거주하던 이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소련의 일부였던 중앙아시아를 극동 지역처럼 한인들의 힘을 빌어 개발하려, 혹은 현지 지역 사회에서 한인들의 힘이 커지는 걸 방지하고자 보냈다는 설도 있다.
1937년 9월 17만 명 고려인은 열차 화물칸에 실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Уштобе)의 황량한 땅에 내려졌다. 열차에서 이동 중 1만여 명이나 숨졌다. 땅굴을 파서 생존해 나가며 현지인의 도움도 받았다.
힘들고 긴 여정에 살아남은 고려인들은 뛰어난 농작 능력으로 땅을 일구고 집단농장을 경영할 수 있었다. 황무지를 옥토로 만든 그들의 근성 덕분에 국가에서 훈장을 받기도 했다.
다시 삶의 터전을 찾아
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분리된 독립국가에서 민족주의가 팽배해져 고려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자, 재이주가 시작됐다. 농사를 지으려 연해주,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로 이주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떠났다.
그렇게 다시 삶의 터전을 옮긴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정착해 이제는 현지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지 사회에서 높게 평가 받는 고려인도, 권력의 자리에 선 이들도 많다.
이제는 더 이상 '강제 이주'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동정보다는 존중의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불의의 사고로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소련 록 음악의 선구자 고려인 3세 '빅토르 최(1962~1990)' 추모의 벽.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있다.
고려인은 우리와 러시아 사이의 소중한 연결고리로서 역사적 교집합을 가진 소중한 인적 파워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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