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⑨ 겨울의 일상에 녹아들다

눈과 얼음, 겨울 왕국에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

by 모험소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춥고 긴 겨울,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깊게 낀 해무, 얼음 바다....

그런 자연과 기후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이곳 사람들의 인내심이 그토록 대단한 이유가

러시아의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내기 위한 준비운동일 뿐임을,

현지 생활하며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정말 절실히 느끼는거지만 러시아인들은 참 대단한 민족인 것 같다.
이런 혹한도 잘 참고 견딘다. 이토록 미끄러운 빙판 위도 굽있는 구두를 신고 다닌다. 추워 죽겠는데 얼굴을 훤히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며 버스는 언제올지 모르는데 얼굴 시뻘개지면서도 그저 기다린다. 미끄러지는 자동차가 계속 헛바퀴질 하는 도로 사정인데도 "뭐 날씨 안 좋으면 늘 이렇지"하며 불평하지 않고 잘 순응한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참고 또 참고... 혹한 속에서도, 길게 서있는 줄 가운데서도 항상 같은 모습이다. 나 같으면 추워 죽겠다고 따뜻한 곳으로 피하거나 줄 길다고 금방 포기할 것 같은데.


지난 겨울 내 차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왔던 러시아 청년도, 정말 손이 얼어서 감각이 없을 정도의 추위였는데, 볼따구와 코가 벌개지도록 추운 날씨였는데, 두 손 호호거리며 도구로 배터리를 분리시키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에겐 그저 익숙한 추위일 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대단해보였다."

- 2010.12.14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특히 그곳의 겨울 일상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주재원 시절이 끝날 거라는 마지막 간절한 기다림 속에 사무친 추위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 겨울왕국 엄청난 눈의 포스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은 한국과 너무도 다르다.

1년의 절반이 겨울이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닷 바람과 촘촘하게 내리는 눈,

기간으로 보나, 현상으로 보나 정말 혹독한 겨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첫눈은 10월이 끝나기 전에 꼭 오곤 했다.

10월이 가기 전에 눈은 찾아온다

폭설 내리는 날도 꽤 있었다.

'눈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육안으로 알 수 있을 정도.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빗물처럼 쏟아지는 날이 이곳 사람들에겐 특별하지 않았다.


눈이 빽빽하게 내리는 어느 날.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는데, 현지직원 사무실이 왁자지껄하더니 한 직원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온다.


오늘은 일찍 귀가해야겠습니다.

설로 인한 위험으로 기업들에 직원들을 일찍 귀가시키라는 시청 공문이 명시된 언론자료였다.


헉. 이런 바쁜 시간에 이럴 일도 있구나 싶다가도,

눈꽃

한편으로는 이처럼 인간적인 러시아가 부럽기도 했다.

비록 본사 직원인 나는 퇴근할 수 없었지만, 시청 지시 대로 직원들을 모두 귀가시켰다.


이런 일은 종종 발생했다. 러시아에서는 휴일이 아닌 12월 25일에도. (러시아 크리스마스는 교회력이 달라 1월 7일 기념한다.)


"와~ 크리스마스다.

폭설이 온대서 직원들을 한시간 빨리 퇴근시켰다. 크리스마스 기분은 잘 안 나네. 밀린 보고서와 정산건들은 나를 쉴틈 없게 하고, 일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허술한 인간이구나.. 란 사실에 한심함도 느낀다. 이 밍기적밍기적거리는 본성은 어찌할까."

- 2009.12.25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또 어느 날은 집에 있는데 눈이 진탕 내렸다.

눈이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일 즈음, 차가 걱정되어 나가 보니 온통 눈세상이다. 무릎보다도 높게 쌓인 하얀 눈이 모든 차를 덮어 마치 볼록 솟아난 무덤처럼 되었다. 그것만이 차가 서있는 곳을 알려주고 있을 뿐.

당장은 길도 안 나있어 제설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차 위에 쌓인 눈을 치우기로 했다.


하지만 내 차 위에 쌓인 눈을 치우는 건 생각보다 처치 곤란한 일이었다.

차를 덮고 있는 처치 곤란한 눈

시동을 걸어 열기로 녹이려 했건만 눈 때문에 차문 열기조차 힘든 상황. 급한 대로 장우산으로 보이는 눈들만 걷어냈지만 손이 다 닿지 않고 눈의 양이 많아서 쉽지 않았다.


바로 그때 친절한 이웃께서 삽을 가져와 주변 눈을 치워주셨다.

삽질은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거구나!

그냥 지나쳐주지 않아서 너무 고마웠고,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러시아의 자연환경과 그로 인해 체득된 이들 문화가 갈수록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2) 길이 빙판으로 변하는 기적


블라디보스토크에 눈이 많이 오다 보니 길 양편으로 치워둔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건 예삿일이다.

눈더미는 바짝 해가 쨍하면 스르르 녹아내렸다가, 밤새 기온이 뚝 떨어지면 빙판으로 돌변하고 만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길이 빙판이 되는 마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때부터 보행자들의 지옥은 시작되는 것이다.


혹한으로 차가 퍼지는 날이면 나는 살얼음판처럼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보행자로가 빙판으로

걷다 보면 이따금 잘 나있던 인도가 사라지기도 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보행로 환경은 그리 안전한 편은 못 된다. 그냥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걷기도 힘든데 거기다 추운 날씨에 바람이 불어닥치는 족족 눈물이 내 눈썹에 결빙되어 눈도 잘 안 떠진다.


"영하 22도.(체감온도는 영하 45도 덜덜덜) 거센 눈보라.

길을 걷는데 세차게 날린 눈발들이 눈꺼풀에 앉아 얼어붙어 마치 심하게 눈곱이 낀마냥 눈이 잘 떠지지 않는 상황 직면. 심지어 아이라인이 번져서 눈탱이밤탱이 되고. 정말 여기가 블라디인지, 아님 남극에 온건지 분간이 안가네. 날씨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가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정말 오지에 오긴 왔나보다 내가."

- 2009.12.30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겨울에 대처하는 복장

나는 빙판을 걸어가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옷차림을 해야 한다.

정장에 미끄러지지 않는 털운동화... 그래도 안전하게 출퇴근하는 게 우선이니.


"영하 20도. 칼바람 쌩쌩. 도시 곳곳은 빙판. 차는 퍼져있음. 결국 오늘 같은 혹한에도 뻬쉬꼼(걸어서) 회사까지 갔다. 아파트를 나서기 전 엘레베이터에서 나의 모습을 찍어봤는데, 빙판길 가다가 미끄러질까봐 정장바지에 겨울 운동화. 목도리, 모자, 장갑 챙기고. 얼굴을 둘둘 말고 눈만 내놓고 출근.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머리가 띵- 눈물이 핑- 정말 익스트림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하루."

- 2010.12.14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3) 음 위를 달리다


겨울 블라디보스토크의 금각만과 아무르만 바다는 혹한이 오면 꽁꽁 얼어붙는다.

누가 블라디보스토크가 얼지 않는 부동항이라 했던가?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얼음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두껍게 얼어 붙을 때 즈음이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얼음 위로 펼쳐졌다.

차들이 얼음 위를 질주하는 것이다.


육로로 가면 돌아서 가야 할 길을 얼음 위로 가로지르면 만 건너편까지 건너갈 수 있다.

하지만 얼음판 위의 운전은 도로교통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

사고라도 나면 보상받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해 볼 만한 재미있는 경험이긴 하다.

얼음 위를 달리다

물론 차 운전은 얼음이 가장 두껍게 얼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날씨가 따뜻해질 무렵에는 잘못 들어갔다가 녹아서 얇아진 얼음이 깨져 차가 바다에 빠지는 사고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했으니 말이다.


나도 주변 이웃들과 함께 얼음 위 질주를 즐겼었다.

정말 신기한 점은 도로 표지판이 없으니 운전대 잡은 이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 참 재미난 인생의 진리와도 같다.

"얼어붙은 바다 위를 달려 아무르만을 가로질러 건너편 육지까지 다다르다. 참 신기해! 얼음 위로 길이 나있다는 게. 도로와는 달리 안내판이 없어서 방향을 잘 잡지 못하면 원래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올수 없다. 사고가 나도 도로교통법을 적용받지 못한다."

- 2010.1.29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미끄러지듯 얼음 위를 달리는 차는 좀 위험해 보이긴 해도 그저 신기하고 신이 난다.

주변에 차가 없어 더욱 자유로우니 말이다.


가다 보면 얼음 위 강태공들이 낚시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겨울 낚시꾼들이 주로 모여있는 구역이 있다. 고기가 잘 잡히는 포인트가 따로 있다는 얘기.


(4) 강태공에 도전하다 명태가 될 뻔하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뭔가 즐거운 추억거리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연초 귀임하는지라 지인들이 연휴에 겨울낚시를 가신다기에 나도 함께 길을 나섰다.

얼음 위를 달려 강태공들이 몰려있는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강태공들이 오밀조밀 몰려있는 어느 얼음바다. 멀리서 보면 진풍경이다.

여름에 줄낚시한 경험도 좀 있겠다,

얼음에 낚시줄 내려 물고기 잡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낚시를 해보겠다는 나의 의지는 엄청난 추위에 꺾여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재미있겠다 싶어 얼음 구멍을 뚫는 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가만히 앉아서 물고기 잡히는 걸 기다리자니 바람이 너무도 추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그나마 따뜻한 자동차에 계속 들락거리는 수밖에.


"정말 춥다. 그렇게 따뜻하게 껴입고 갔는데. 오늘 얼음낚시 따라갔다가 정말 추워 죽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쉴 줄 모르는 칼바람, 허허 벌판 얼음바다 위에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의 기운. 여덟 명이 얼음 깨고 줄낚시해서 건진건 꼴랑 손가락 크기의 꼬류시카(빙어) 두 마리. 난 추워서 차에 들락달락. 먹은 건 추위 이기려고 마신 1년된 산삼주 두 잔, 그리고 컵라면 하나. 코로 들어가는건지 입으로 들어가는건지 원. 추워서 일단 쳐넣었는데. 원래 그렇게 바람부는 혹한 추위에는 물고기도 안잡힌다는...

강태공이 되어보려는 어르신들

하나 둘씩 없어지던 낚시꾼들. 낚시하려고 겨우 2시간 있었을 뿐인데, 4-5시간은 족히 있었던 듯한 느낌. 아무튼 혹독하게 추위를 느끼고 왔다."

- 2011.1.4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8인이 출동해 꼴랑 빙어 두 마리.

결론적으로는 날이 궂었다. 강태공 되려다 명태가 될 뻔했다.

너무 춥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낚시도 잘 안 된단다. 날씨만 좀 받쳐줬어도 많이 잡혔을 거다.


그래도 고기 많이 잡기 위해 간 얼음낚시라기보단,

얼음 위에 앉아 먹고 얘기하며 이것저것 해봤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었다.

얼음바다 위 썰매

'러시아 사람들이 겨울에 이렇게 살아가는구나'를 경험해 보면서

일종의 생존 체험을 했다. 나도 한층 더 단단해졌을 거다.




그렇게 겨울의 일상에 녹아들면서

나의 블라디보스토크 주재원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예정된 임기보다는 일찍 한국에 돌아오긴 했지만,

회사에서 러시아로 파견된 여자 주재원 중에서는

내가 퇴사자가 아닌 첫 생존자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칭찬하며.

(나 이후에 대부분은 생존 중이시다)


교환학생 시절부터 주재원 생활까지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긴, 달콤 쌉사름했던 러시아에서의 시간들

평생 잊을 수 없는, 값진 인생의 기반이 되어주고 있다.


힘들 때면 가끔 이런 생각으로 버텨내니 말이다.

러시아에서도 살아 돌아왔는데,
한국에서 내가 못할 게 뭐 있어?


그래, 고맙다. 러시아.

러시아 겨울을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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