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아아아아아앙 이 소리는. 얼음길 위로 차 바퀴 미끄러지는소리입니다. 어제 참 많이 듣던 소리. 나는 다행히도.. 별탈없이. 미끄러지는 차 옆을 지나가며 하는 말. '나는 사륜구동이야!'"
- 2009.11.3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눈길에도 헛바퀴 굴리지 않는 강력한 나의 무기 덕분에
'역시 잘 선택했어!'하며 한껏 어깨에 뽕이 들어갔었다.
단지 실외 주차장이라 특히 겨울은 날씨에 따라 차에 손이 많이 가긴 했다.
길이 고르지 않은데다 염화칼슘으로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부식돼 구멍만 많아진 노면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니는 덜컹덜컹 자동차는 유난히 잔고장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사실 때문에 현지 자동차 수리 업체는 수입이 꽤 쏠쏠했을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고객 덕분에.
아무튼 첫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아 무난히 흘렀지만,
두 번째 겨울부터는 혹독한 추위로 각종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2) 바퀴와 한바탕 씨름
러시아에서는 한국과 달리 자동차 바퀴를 두 가지로 사용해야 한다.
여름 바퀴, 그리고 겨울 바퀴.
1년의 절반이 겨울인 러시아 특성상 날이 추워지면 반드시 겨울 바퀴로 갈아줘야 한다. 겨울에 여름 바퀴로 다니면 길이 미끄러워 운전이 위험해지고, 여름에 겨울 바퀴를 하면 지열에 바퀴가 닳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차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겨울용, 여름용 바퀴를 세트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를 쓰지 않는 시즌이면 나머지 바퀴들은 어딘가 보관되어야 한다. 나 또한 집채 만한 바퀴 네 개를 우리집 다용도실에 한가득 보관하고 있었다. 바퀴 교체 시즌만 되면 나 혼자 거대한 바퀴들을 굴리고 들어서 작은 엘리베이터로 2~3번 걸쳐 옮겨 내 차에 실었다. 보통 일이 아니다. 할 때마다 욕이 나올 지경.
아날로그식 중고차
시즌마다 찾아오는 교체 외에도 바퀴 맛(?) 제대로 본 적이 있다.
한창 운전에 맛을 들이고 자신감이 붙었을 무렵, 신나게 운전하다 바퀴에 펑크를 낸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돌부리에 찢어졌다.
그때 알았다.
내가 차에 대해 정말 무지한 인간임을.
"왜 이러냐 오늘.
열심히 차로 집에 들어오는 길에 멋지게 커브 꺾어주겠다고 아파트 입구 통행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퍽!"
무슨소리지? 그리고 계속해서 엑셀을 밟고서야 알았다. 바퀴에 문제가 생긴 것을.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덜덜덜거리며 힘들게 올라갔으니까. 차를 세워놓고 보니 뒷바퀴 하나가 완전히 가라앉아있었다. 커브 돌면서 부딪혔던 돌턱에 그만 바퀴에 큰 구멍이 난 모양. 정말 내 눈앞에 힘없이 축 늘어져있는 바퀴를 보니 한 숨만. 옆에서 보던 러시아 아줌마가 몇마디 하시더니 예비 바퀴가 늘 자동차 밑에 붙어있으니 그걸로 바꾸면 되니까 걱정말라 한다. 그제서야 알았다.내가 항상 스페어 바퀴를 달고 다녔다는 사실을."
- 2009.8.6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블라디보스토크 맨땅 위에서는 보험사 호출이나 카센터 출장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당장 펑크 난 바퀴를 고쳐야 하는데, 도저히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회사 기사님께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이 순간만큼은 '남성의 도움은 이럴 때 꼭 필요한 것이구나'를 절감했다.
내가 차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센 것도 아니니
어떻게 바퀴와 생사투를 벌일 수 있었겠는가?
"잔뜩 걱정을 삼으며 아침 8시부터 기사님께 SOS를 청했다. '우 미냐 쁘로지바(부탁이 있어요)'. 역시 차에 대해 잘 아는 기사님. 척 보면 딱인듯. 난 평소 내가 타고 다니는 차에 이렇게도 모든 것이 구비되어있는 줄은 몰랐다. 스페어 타이어하며, 임시 수리용으로 차를 들어올리는 장치(뭐라 해야할지 모르겠음)까지. 평소에 '이게 뭐야?' 지나쳤던 트렁크의 이상한 쇠봉(?)도 다 쓸모가 있음을 그제서야 알았다. 이런 무지한지고. 아무튼 기사님은 정말 열심히 도와줬다. 덕분에 숨어있는 스페어 타이어 빼는 법도 알게 되었고. 차를 들어올려 바람 빠진 타이어를 빼고 새 타이어를 갈아 넣고 조이고 빼고 넣고. ...(중략)... 아무튼 남성의 힘과 머리, 도움이 절실했던 차에 항상 내 주변에 좋은 사람만 있는 덕분에 또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
- 2009.8.7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나는 결국 그렇게 기사님을 카센터 직원처럼 부려먹고 말았다.
수고비를 드리며 하신 김에 찢어진 타이어 수리도 부탁드렸고,
다행히 바퀴와의 사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3) 조심조심 겨울 운전
두 번째 겨울부터 눈이 많이 오고 혹한도 자주 왔다. 운전하기 최악의 조건이다.
'첫 겨울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을 정도.
눈이 너무 많이 오기도 했고, 날씨까지 추우니 이건 정말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던 거다.
눈이 세차게 내린 후 쨍하는 햇볕에 녹아내렸다가, 밤에는 녹았던 눈이 다시 얼어붙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도로는 그야말로 빙판이 되고 만다.
차 하나만 믿고 '눈길쯤이야' 생각했던 나를
위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블라디의 온갖 길들은 빙판길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길을 걸어다니는 것뿐이 아니라, 차를 몰고 다니는데 아주 초난감이다. 4륜인 내 차조차도. 그냥 빙판이면 모르겠는데 수많은 타이어의 상처들을 남기고 간 울퉁불퉁 빙판길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분명 엑셀은 밟고 있는데 차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다른 곳으로 가고, 헛바퀴 도는데 무리해서 밟아 잘못하면 빙글 돌기까지 한다. 좀 아찔하긴 하다. 어제는 집에 오는 길 반대편에서 오는 차 때문에 잠시 정차했다가(원래 반동으로 주욱 가면 좋은데 중간에 서면 완전 에러) 출발하는데 헛바퀴.. '위이이이이이잉'
얼음길에 나서는 자세
한 번 후진하고 다시 핸들을 돌리고 엑셀을 밟으니 이젠 빙그르르 살짝 회전을 한다. 다 괜찮은데 주변에 차나 사람이 있으면 위험하다. 그래도 다행히 후진에 전진을 거듭하며 행인의 도움 받아 잘 빠져나왔다. 당황치 않고. 역시 빙판이 그대로 방치된 골목길은 안 다니는게 좋다. 비록 오늘도 얼음 길에서 약간 미끄러져 우회해 나왔지만, 운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주차하는거 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사실 차가 있으니 애물단지이긴 하다. 아침에 일찍 나와 차를 따뜻하게 덥혀야 하고, 눈 오면 눈 치워야 하고, 배터리 나가면 아무짝에 쓸모도 없고."
- 2009.12.24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하지만 이런 상황도 몇 번 반복되니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 운전자들은 다른 자동차에 빨리 가라고 재촉하거나 화내지 않고 잘 기다려줄 뿐만 아니라,
차를 덥히려면 항상 평소보다 일찍 나와야 한다
어려움에 빠진 상황을 보면 오히려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니
얼마나 고맙고 매너가 일품인지 모른다.
"크리스마스날 영하 20도에도 이젠 제법 시동이 잘 걸려, 앗싸! 사람 여섯 명을 태운 내 차, 놀러갔다가 길 잘못 들어서 차를 빼려다가 앞바퀴 두개가 눈 속으로 수욱수욱. 점점 눈속에 파묻혀 헛바퀴만 질질질... 역시 난 베스트 드라이버는 아니었어. 결국 SOS해서 삽질 도움 좀 받고 장정 5명이 소렌토를 손으로 밀어서 겨우 탈출에 성공. 와오. 크리스마스의 함정!"
- 2010.12.27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그래도 역시 러시아 겨울 운전은 안심하면 안 된다.
(4) 한국 자동차에게 러시아의 추위란
내가 타고 다닌 한국 SUV는 추진력이 참 좋았다. 하지만 겨울에는 최악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산길, 언덕길도 잘 다니던 차가 영하 23도 이하만 되면 정신을 놔버리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이 넘는 추위가 닥치면 어김없이 퍼지던 차. 아침마다 기상 상황을 체크하는건 필수 사항이 되어버렸다. 영하 20도 정도면 시동이 걸릴 듯도 싶고, 23도 아래로 떨어지면 그날 아침은 회사까지 걸어가야 했다.
눈길
일본차는 삿포로처럼 추운 지역에도 다닐 것을 고려해 만들어져 러시아의 겨울도 제법 견뎌냈지만,
한국차는 혹한에 맞춰 설계되지 않은 데다, 특히 경유차는 가솔린차보다 추위에 더욱 약했다.
게다가 내 차는 중고차였으니 아무래도 성능이 새차만도 못했을 것이다.
한국차, 경유차, 중고차. 내 차는 러시아를 나는데 최악의 조건은 다 갖춘 셈이었다.
연말 연초 징검다리 휴일을 낀 어느 겨울, 거의 한 달 정도 차를 타지도 못하고 방치시킨 적도 있다.
긴 연휴로 고쳐달라고 부를 사람도, 센터도 없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뚜벅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차가 또 퍼졌다. 아파트 주차장에 공사 차량 들어와야 하는데 내 차가 막고 있다고 치워달란다. 아침부터 혹한에 한시간 반을 서서 시동 걸려고 몹쓸짓을 했더니 손발이 얼어붙었다. 중고차 세금이 너무 비싸서 원래 내 차를 사기로 한 분이 포기했다. 어떻게 5년 이상된 차 세금만 17,000달러나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다시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내 차. 오후에 시동 걸어보겠다고 기사님이랑 다시 갔는데, 배터리 연결선이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돌아왔다."
- 2010.12.10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그렇게 겨울마다 사투를 벌이다가 내가 한국에 귀임할 시즌이 다가오자,
차 처분은 해야 하는데 겨울에 퍼지는 습관이 고쳐지지 않아 난감한 상황을 맞이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시기 즈음 중고차 수입 제한 제도가 시행되면서 현지 중고차 세금까지 세게 매겨져
이대로라면 살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쳐서 누구라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5) 퍼진 차 소생 작전
나의 차가 더 이상 겨울에 퍼지지 않게 하려면,
그래서 나도 한국에 돌아가기 전 차를 다른 누군가에게 팔려면, 멀쩡한 상태로 만들어 놔야 했다.
결국 한국에 있는 중고차 업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시행착오 끝에 원인을 알아냈다.
방전된 배터리를 바꿔도 기온이 낮아질 때마다 차가 퍼지가 이유는 연료펌프와 예열초크에 있었던 것. 이 부품들만 새것으로 교체하면 시동거는 것이 한결 수월할 거란다. 그래서 부품을 한국으로부터 조달받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내 차는 혹한에 퍼진다
부품이 저녁 즈음 도착한지라 다음 날 아침 자동차 수리점에 보내 부품을 교체해야 하는데,
밤 사이 떨어진 기온에 차가 방전되면 아침에 수리점으로 몰고 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경험했다시피 이곳에는 출장 방문과 같은 시스템은 없었다.
이미 날은 매우 추운 시기였고, 내일 아침 내 차의 방전도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아침까지 내 차가 무사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모험을 하기로 했다. 그냥 시동을 내일 아침까지 틀어놓으면 된다.
"예전에 건물주네 차가 나처럼 혹한에 시동이 안걸린다기에 밤 내내 키를 꽂고 놔뒀다고 했다. 그냥 피식 웃었다. 아무리 시동이 안걸려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런데, 내가 어제 그랬다. 온전히 차를 팔기 위해서. 차를 팔려면 지금 혹한에 어려운 시동 문제를 해결해놔야 한다. 차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내가, 그것도 러시아어로 관련용어까지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어제는 엔진오일(моторное масло)도 제일 좋은 걸(синтетика)로 갈고, 교체가 필요하다는 연료펌프(топливный насос)랑 예열초크(свечи)도 지인들을 통해 가까스로 어제밤에 다 구했다. 겨우 부품들도 이제 구했는데 시동이 안 걸려 수리 못맡기면 안습이니까, 오늘 아침까지는 살려놔야 했다.
한국에서 공수받은 배터리와 부품들
밤늦게 완전 추워진다하는 소식에 불안해서 아파트 주차장에서 밤 내내 차 시동을 걸어놓는 진풍경을 벌였다. 경비에게 좀 지켜봐달라 얘기해놓긴 했지만 다소 미친 짓이긴 했다. 스페어 키도 없는데 차 문을 열어둔 채 시동을 걸어놓은 건, "내 차 가져가쇼"나 마찬가지니까. 그냥 어차피 누군가 훔쳐가도 혹한에 퍼지는 차니까 별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일주일 간 내가 차 못 빼줘서 욕 본 경비가 좀 안쓰러웠는지, 그래도 나중에 퍼져 못 빼는 거 보단 시동 계속 걸어놓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는지 연료가 충분하냐고 물어본다.
아무튼 참 재밌는 상황이었다. 그냥 혼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참 한국 디젤차가 생존하기 쉽지 않은 블라디 환경. 그래도 키 꽂아둔게 신경이 쓰였는지 아침에 알람도 울리기 전에 깼다. 차 땜에 은근 스트레스 받고 있었던 모양. 수리는 오늘중으로 끝난댄다. 이거 잘 마치고 때 빼고 광 내면, 그래도 좀 구매 의향에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흐아아. 아무튼 참 진기한 경험 많이 한다. with 인내심"
- 2010.12.23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차에서 많이 하던 셀카 놀이
그 정성 덕분에 결국 내 차는 소생했고, 그렇게 후임자에게 팔리게 되었다.
나의 첫차였던 녀석은 나중에 많은 세금 지불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걸 주인 잘 만났다고 하는 걸까? 난 좋은 주인은 아니었나 보다. 잘 못해준 것 같아 괜시리 미안해진다.
나를 울고 웃게 한 러시아에서의 첫 차,
나에게 사람들을 태우는 즐거움, 드라이브의 쾌감을 알려주고 수많은 모험담을 안겨준 녀석이
지금도 나는 너무 그립고 고맙다.
나를 고생길로 안내한 첫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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