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놀이 1부

4. 백일몽

by 운정




어릴 때, 마루에서 낮잠을 자며 꿈을 꾸었다.

마을 어귀 동산에 서서 마을로 이어지는 기다란 길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새까만 장막이 쳐져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찬 바람과 함께 쭈삣 뭉툭한 뭔가가 나를 밀어냈다. 나는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달리고 달려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헐떡이다 꿈에서 깼다. 다시 꿈속이었다. 또 그 마을 어귀였다. 또 달렸다. 깼다. 또 그 마을 어귀였다.

그렇게 달리다 헐떡이며 깨기를 서너 번 하다 눈에 마루로 난 격자무늬 방문창살이 어른거렸다.

그제야 꿈에서 놓여나 긴 숨을 쉬었다.


“아가, 일어나 봐, 땀 좀 봐, 무슨 잠을 그리 오래 자누, 이따 밤에 못 자, 아가, 어서 일어나 봐.”


어렴풋이 어깨와 머리에 할머니 손길이 느껴졌다. 할머니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마루에 손을 짚고 일어나 앉으니 몽롱한 느낌이 머리가슴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해는 뉘엿뉘엿 앞집 기와지붕너머로 넘어가며 마당가 나무 짙푸른 이파리를 노랗게 빛나게 하고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내 이마를 만지는 할머니의 거친 손바닥이 시원했다.

할머니의 쳐진 젖가슴을 파고들며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대고 앉아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머리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할머니, 또 같은 꿈을 꿨어, 길을 걸어갔어, 그리고 달리고 달렸어, 숨이 차 죽을 것 같았어, 할머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긴 한숨을 쉬었다.


"애기가 뭔 한숨을 그리 쉬누."


할머니는 나를 당신 몸에 기대게 한채 얼굴과 목을 찬 수건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뭐 나쁜 꿈 꿨냐? 낮잠 잘 때 꾸는 꿈은 다 귀신이 장난하는 거란다. 좀 있으면 금방 잊어먹고 말지.”


'꿈이니까, 금방 없어져, 금방 사라질 거야. 그래 금방 잊어먹고 말지.'




그날은 어느 여름밤이었다.

엄마는 시장에서 옷장사를 했는데 여름에는 10시가 다 되어야 집에 왔다.

나는 종종 엄마를 마중 나가곤 했는데, 집에서 엄마의 옷가게까지 걸어서 열 살짜리 꼬마 걸음으로 30분은 걸렸다. 그 길 반만 걸어가도 돌아오는 엄마를 만나곤 했다.

그날도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좀 일찍 나섰던 것 같다.

기다란 골목을 벗어나 차 다니는 그 큰길까지 가면 극장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그 큰 길가에서 가장 밝은 곳이었다.

환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과 극장 간판의 불빛 때문에 무섭지 않게 엄마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날따라 집에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왔던 거 같았다.

극장 앞에 다다라 가로수에 기대고 엄마가 어디만큼 오는지 고개를 쭉 빼고 인도 저 앞쪽을 보고 있었다.


'저만치 엄마가 보이면 달려가 엄마와 손을 잡고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야지, 오늘 배운 노래도 불러 줘야지.'


나는 배실배실 웃으며 혼자소리하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극장 앞에는 사내 몇몇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엄마를 마중 오는 날이면 늘 보던 모습이었고

그들은 내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말도 건 적이 없었기에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했다.


갑자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동시에 불쑥 어떤 손이 과자를 내밀었다. 놀란 순간 다른 한 손이 내 어깨를 낚아채더니 나를 극장 쪽으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난 온몸이 얼어붙어 어떤 말도 어떤 소리도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사내 하나가 극장 문 앞에서 본능적으로 버둥거리는 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빠르게 극장 안쪽 어딘가로 향했다. 까만 장막을 걷고 들어가자 칠흑같이 어두웠고 서늘한 공기에 매캐한 곰팡이냄새와 꼬리 한 냄새가 섞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때서야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집에 갈 거야, 내려줘, 내려줘, 내려줘어어어 아아악!!!” 악을 썼다.


숨이 가빠오고 공포가 전율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마지막 소리에 죽을힘을 다했다.

커다란 손이 내 입을 막으려 덮쳐왔고 그 손으로 입과 코뿐만 아니라 온 얼굴을 짓눌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사내는 쉬쉬거리며 어떤 딱딱한 긴 의자에 나를 던지다시피 하고는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지 바지를 까내렸다.

나는 까무러쳤고 오로지 담배 냄새와 퀴퀴한 몸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그 사내는 내 아랫도리에 단단한 고깃덩어리를 쑤시려고 했으나 내 얼굴을 누르고 한 손으로는 본능적으로 발버둥거리는 내 다리를 잡느라 허공에서 허둥대었다. 목을 짓눌러 소리는 나오지 못하고 본능적인 방어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그를 쳐 댔다.

쇳덩이 같이 둔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헤집더니 이내 내 허벅지 사이에 뜨거운 액체가 들이부어졌다. 그 사내는 바지춤을 올리고 악악거리며 숨차게 우는 나를 다시 둘러메고 순식간에 극장밖으로 나왔다. 여름밤의 훅 더운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쳤다. 사내는 길가 가로수 나무에 나를 기대어 세워 놓더니 휙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곳에 과자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갑자기 몸에 힘이 풀리고 마치 다리가 없는 것 같이 나무 등걸에 기댄 내 몸이 주르륵 내려와 땅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하더니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옷을 찢어 벗어버리고 싶었다. 온몸이 떨리고 목에 뭐가 걸린 듯 컥컥거리고 눈물 콧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멀리서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주변이 보이고 정신이 들어 몸을 세우고 눈물 콧물을 옷소매로 닦았다.

그때, 그날, 10살 어린 꼬마였던 나는 더럽고 냄새나는 몸뚱이로 엄마를 마중하고 엄마품에 안기는 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그냥 온몸으로 알았던 것 같다.

어둑한 가로등아래 100미터 남짓 거리에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집으로 냅다 달렸다.


숨을 쉬지도 않고 멈추지 않고 집으로 달려 들어와 마당 수돗가에 있는 양동이 물을 옷 입은 채로 뒤집어썼다. 수도를 틀고 얼굴과 목 어깨 다리를 손으로 물을 퍼서 뿌리고 문지르다 물을 뚝뚝 흘리며 마루에 올라서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마루에 있는 서랍장을 열고 옷을 찾아 갈아입었다.

그리고 동생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 냄새와 공포가 다시 덮쳐올 것만 같았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빠는 퇴근 후 저녁 식사하고 가게에 나가 엄마를 먼저 퇴근시킨 후 가게문을 닫고 오셨다.

엄마가 오고 곧이어 아빠가 대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방밖에서는 엄마와 아빠가 자분자분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뭔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나? 애가 나를 보더니 냅다 도망가는 거야.‘ 하는 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했다.


그 후로 자주 같은 꿈을 꾸었다. 끝나지 않는 길을 걷고 걷고 또 걷는 꿈을 꾸었다.

할머니 말대로 귀신이 장난하는 건지 낮잠을 자면 어김없이 그 마을을 향해 길을 따라 걷다 달리다 걷다 달 리다를 반복했다. 아무도 없는 빈 들판길을 혼자서 갔다. 마을을 향해, 그리고 멀리 보이는 누군가를 향해 갔다.

그러나 그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어딘가에 그리고 누군가에게 다다르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꿈에 갇혔다.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는 꿈, 그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낮 꿈을 꾸고 일어나면 머리가 너무 아팠다.

언제부턴가 낮잠을 자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낮잠을 자지 않았다.

낮 꿈을 꾸지 않은 시간이 오래 지나갔다.


십수 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 가끔 소파에서 선 잠이 들 때가 있었는데 어릴 때 꾸던 꿈을 꿀 때가 있었다.

그때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 여지없이 같은 마을을 향해 들판길을 걸었다.

달라진 것은 뭔가를 향해 내달리지는 않았고, 가끔 옆에 다른 사람과 함께 걷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하거나 얼굴을 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동행하는 것 같기는 했다.

마을 풍경이 흑백일 때도 있지만 초록빛, 연둣빛, 노란빛, 붉은빛도 보였다.

여전히 나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였고 그 마을 들어가는 길을 따라 앞만 보고 걷고 걸었다.

그러나 그 마을에 다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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