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놀이 1부

5. 배경

by 운정




엄마와 아빠는 중매로 결혼을 했다. 먼 친척 한 분이 고아나 다름없는 아빠를 소개하면서 야간고등학교 나와 전기회사 다니는 성실한 청년이고, 부모가 일찍 죽어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래도 사람 좋겠다, 먹고 살만큼 월급 받는 월급쟁이니 먹고사는 것은 걱정 없다.' 하자, 외할머니가 흔쾌히 수락해서 결혼하게 되었다. 할머니 한분이 시골에 사시는데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시집살이할 것도 없다고도 했다. 이 할머니는 우리에게 증조할머니로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엄마가 장사를 시작하면서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고 우리 자매를 돌봐주었다. 엄마도 나의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장사하던 외할머니와 단출히 살았으니 엄마와 아빠는 서로 얼마나 의지했을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엄마는 아빠를 처음 보았을 때 말이 없어 좋았다고 했다. 점잖고 성실한 사람 같아서 결혼하면 '맘고생 안 시키고 밥 먹고는 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수줍은 듯 빙긋 웃으며 이런 우스갯소리도 했다.


"네가 이쁜 거는 아빠 닮아서 그래."


어느 때부턴가 엄마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네 아빠의 서늘한 눈매를 보고 인상 좋고 점잖고 세상 법 없이도 사는 순한 사람인 줄 알지. 네 아빠는 입에 풀발라논 사람처럼 말도 없고 주변머리가 없어, 답답할 때가 많아. 그러다 한번 성질나면 어쩌게? 눈빛이 싹 변하는 것이 무서워. 예민하고 까칠한 것은 네가 똑 닮았어."


아빠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전기기술자가 되어 대기업에 다녔고 다닌 지 6년째가 되는 25살에 엄마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우리 세 자매를 낳고 키우던 그의 나이 겨우 사십이 되던 해, 위암판정을 받게 되었다. 수술하고 완치한 줄 알았던 암이 골수암으로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아빠가 위암이 걸렸을 때 나는 막 중학교에 입학한 열네 살이었고, 아빠가 돌아가실 때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3 마지막 겨울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홀로 된 엄마에게 어린 자식 3명과 증조할머니, 아빠의 예금 통장의 얼마 안 되는 잔금, 그리고 외벌이 가장의 벌이로 겨우 마련한 회기동 작은 집이 남겨졌다.

엄마는 지금도 때때로 아빠를 떠올리며 한숨을 깊게 쉬곤 말했다.


"그 이쁜 손주하나 못 보고..."


"중고등학교를 고학하다시피 다니고 그렇게 고생고생하다 좀 살만하니 암에 걸리고... 지지리 부모복도 없더니... 그리 허망하게 가고... 에고, 불쌍한 사람..."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아빠의 서재에 있는 책이었다. 정비석의 삼국지, 한국단편소설집, 작은 시집들, 위인전집, 세계위인인명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등, 이 골방 같은 서재에는 책이 꽉 차있었는데 미처 꽂히지 못한 책은 가로로 책위에 놓여 있을 정도였다. 글을 읽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이 서재를 드나들었다.

서재에는 성인 두 명이 좁게 앉을만한 검정 소파가 있었는데 어린 내가 푹신하고 그리 높지 않은 소파걸이에 기대 누워 책 읽기 딱 이었다. 나는 방학이면 하루 종일 골방 소파에 앉다 누웠다 반복하며 책을 읽느라 좀처럼 나가지 않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나 동네에서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던 나는 친구들과의 그 시절 기억보다 이 골방서재에서 뒹구리 방구리 책 읽다 일기 쓰다 숙제하며 지내기를 좋아했다. 동생들이 놀아 달라고 하면 쪼꼬만 계집애 셋이 소파에 올라가 붙어 앉아 종이 인형을 잘라 옷을 입혀가며 이야기를 지어내 놀아주었다. 동생들의 까륵 까륵 웃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동생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이야기 짓기 놀이를 했지만 나는 아마도 신나 했던 것 같다. 자라면서 동생들은 나더러 글을 써보라며 예전 그 시절 얘기를 종종 꺼내곤 했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기보다 골방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어릴 때 우리 자매를 돌봐주신 증조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얘야, 책을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그만 책 읽고 이리 와 어서 밥 먹어라."


아빠의 체취가 남아있던 유일한 곳이었기에 이 집을 떠나 이사하던 날,


'아빠와 나의 아지트 같았던 이 방을 떠나는 것은 아빠를 두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해. 하지만 내 영혼이 아니라 껍데기뿐인 몸만 가는 거야, 아빠 안녕!'


그렇게 아빠에게 인사하며 눈물지었다.


우리 가족은 동대문구 회기역 근처 어느 작은 주택에 살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빠의 벌이로는 아이들 대학 보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량리 시장 근처에서 옷가게를 했다. 옷장사로 장사재미를 보지 못하게 되자, 음식솜씨가 남달리 좋은 엄마는 주변의 권유로 식당을 열었다. 엄마는 손님에게 사분사분하게 말하는 친절한 장사치는 아니었다. 음식 타박하거나 툴툴거리는 사람에게는 돈 안 받을 테니 나가라며 밥 먹는 중간에 내쫓기 일쑤였다. 불친절하지만 맛이 좋으니 단골들은 많아 그런대로 운영했다. 엄마는 그동안 애들 교육비에 조금이라도 보태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장사를 아빠가 돌아가신 후 생계를 위한 돈벌이를 해야만 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식당을 접었다.

친구, 친척 등을 만나며 먹고살 일을 알아보던 중 우연히 동대문종합시장에서 실도매상을 하는 고향 친구를 만나 도매상이라는 새로운 장사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때부터 엄마는 하루하루 가게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옷가게나 식당으로 애들 교육비나 벌자는 소박한 주부 소매상이 아니라 도매 유통사업가로 바꾸기 시작했다.


엄마의 사업수완은 애초부터 타고난 것 같았다. 원사를 사다 내년에 유행할 색상을 골라 염색공장에 맡기면 장갑공장, 스웨터공장 등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엄마의 탁월한 감각은 유행색상을 선도했다. 선점한 원사와 염색공장과의 직접적인 거래를 성사시키며 엄마는 동대문종합시장에서 터줏대감이 되어갔다. 엄마를 통하지 않고는 공장에 줄을 대기 어려웠다. 또한 당시 상인회의 계모임의 계주로 뽑히며 신뢰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아빠의 월급이라는 그늘이 엄마의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가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는 사업적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부동산을 보는 눈이 탁월하여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가을날, 집을 넓혀 논현동주택으로 이사하고 불과 2년 남짓지나 차액을 남기고 팔더니 영동시장 근처에 낡은 건물 매입을 시작으로 강남에만 3개의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집, 건물, 땅을 보러 다닐 때뿐만 아니라 부동산 계약할 때 나를 늘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반드시 마지막 도장을 찍기 전 나에게 부동산 계약서를 소리 내어 읽어보게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한강지류인 중랑천 주변에 살았지만 고등 2학년이 되면서 강남으로 이사하고 대학생이 되면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친구들은 대대로 강남부자집안이라 여겼을 터였다. 아파트로 오면서 할머니는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시골친척집에 맡겨져 내려가셨다. 엄마는 가사전담 파출부를 불렀고 우리 자매에게 대학입시에 필요한 과외학습뿐만 아니라 악기와 그림 그리기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시켰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젊은 엄마는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 철칙이 되었다.

엄마는 학기 초에 학교에 제출하는 우리의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란에 ‘회사원‘, 엄마는 ‘전업주부‘라고 썼다.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건지, 아님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은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아빠는 늘 회사원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처럼 기록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 자매들은 엄마가 일하는 동대문종합시장에 가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못 오게 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장사를 배우면 안 돼. 많이 배운 니들은 장사를 배워선 안돼. 엄마도 애초에 장사할 사람은 아니지만 먹고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너희들 친구들이 다 여상 간다 해도 난 우리 딸들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 요즘 세상에 여자들이 고등학교만 나와도 된다고 하지만 난 우리 자식들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희들은 돈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


사람들은 당신 못 배운 거 푸느라 엄마가 자식교육에 열성이지 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엄마의 말끝에는 반드시 또 이런 말이 붙었다.


“여자라도 대학을 나와야 시집을 잘 가지,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남자 만나 고생 안 하고 사는 여자 팔자가 최고야. 엄마처럼 장사하고 천하게 사는 것은 나로 족해.”


엄마는 큰 딸인 나에게만큼은 이러한 말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어미로서의 사랑과 보호가 엄마의 생존본능과 모성애가 결합되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난 숨이 막혔지만 나는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착한 큰 딸역할에 저항 없이 순응했다. 엄마의 권유로 선을 본 남자와 결혼했고 엄마가 사주는 집에서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에게 마치 어른인 것처럼 행세하며 살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 준비하는 모든 엄마의 선택은 사랑이었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한부모의 자랑이었기에 우리는 엄마가 주는 혜택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 모든 혜택에 숨이 차고 왠지 모를 답답함에 가슴이 무거워져 가고 있었지만 그것이 엄마의 지나친 사랑 탓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어린 날에 망가져버린 나의 몸과 내면 의식 속에 자리 잡은 불안과 무기력감이 나의 외부자극에 대한 대처 능력을 얼마나 마비시켰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늘 외부세계에 져주고 있었다.

밝고 환하게 빛나는 배경뒤에 숨어 나의 내면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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