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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Sep 08. 2022

사피니아

한 해 내내 수고했어

살아있는 것들은 키우지 않는다. 

책임질 수 없으니까. 

그래도 꽃이 좋아 꽃화분 하나만 딱 가져다 놓기로 했다.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예전에 버터 스틱 빵같이 생긴 선인장에 잘 크라고 우유를 부었는데 얼마 안가 죽은 걸 보니 좋은 방법은 아닌 듯하다. 꽃 이름이 '사피니아'라고 했다. 봄이 되면 담장 울타리를 둘러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꽃화분이 늘 로망이었는데, 이곳 건물은 화분을 매달 곳이 마땅치 않아 오후 내내 햇빛이 드는 베란다에 내려놓았다. 그래야 투명한 창문 너머로 꽃을 자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을 자주 주면 안 된다는 글과 자주 주어야 한다는 여러 정보가 있었는데 활짝 핀 꽃이 아침에 시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매일 한 바가지씩 물을 부어 주었다. 어쩌다 꽃이 핀 화분을 선물 받아도 그 꽃이 떨어지면 다시 피는 일이 없이 전체가 말라죽곤 했는데, 이 꽃은 아침마다 새로운 꽃을 활짝 피어냈다. 한두 번 그러다가 얼마 안가 다른 화분들처럼 꽃이 시들다가 죽어버리겠지 생각했는데 봄을 지나 한 여름 뙤약볕을 거쳐 가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매일 새로운 꽃을 피워내고 있다. 


새끼를 많이 낳은 개가 쭈글쭈글하게 늘어져 있듯이 이젠 듬성듬성해진 꽃줄기도 힘겨워 보이긴 한다. 꽃의 수도 많이 줄었다. 숱이 줄어든 노인의 머릿속처럼 속이 많이 비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날, 몇 번이나 화분이 뒤집어졌다. 흙덩이가 뿌리와 엉겨 붙어 통째로 화분 밖으로 튀어나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잠시 시들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샛 분홍 꽃들을 한껏 피워냈다. 스튜디오를 며칠 비워야 할 때, 다른 건 걱정이 없었는데 매일 아침 시들어있을 화분에 하루라도 물을 안 주면 금세라도 죽어버릴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며칠 물만 주고 안 들여다보면 시들하다가도 손으로 시든 꽃잎을 떼어서 정리해주고 한참을 바라보면 꽃이 더욱 힘차게 피어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끝인가 싶다가도 아침에 물을 주면 다시금 꽃잎이 되살아났다. 


날씨가 더 추워질 때까지는 살지 못할 것이다. 아래쪽 줄기는 벌써 갈색으로 마르고 시들해진 것이 보인다. 그래도 한참은 몇 송이라도 꽃을 더 피울 것이다. 가성비라고나 할까? 이 꽃은 정말 가성비가 끝내주는 꽃이다. 매일 아침 물은 한 바가지씩 먹었지만, 물만 먹고도 몇 달을 매일같이 신선하고 새로운 꽃을 활짝 피웠으니까 말이다. 한 번 키워봤으니 내년에는 더 많은 사피니아 화분을 들여놓을 생각이다. 


힘겨워하는 꽃에게 말을 건넨다. 


'그간 수고 많이 했어. 고마워. 끝까지 지켜볼게, 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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