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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Oct 06. 2023

당신은 못생겼나요?

외모의 '객관성'?

어쩌다 오랜만에 반갑게 통화한 누군가와 외모에 대해 언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본인의 외모를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딸을 자신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 못생겼다고 하는 소리를 돌려서 말한 것이라며 상대에게 기분이 상해있었다. 그는 씩씩대며 다음번에 그런 소리를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가 잘생긴 얼굴이고 부모 자식이 닮은 건 당연하다 말했더니, 자신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에서 언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객관적 못생김'을 증빙하려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 둘 연관 지어 못생긴 예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예쁘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얼굴이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못생겼는데 나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내가 마치 그의 말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말을 한다고 자꾸만 비아냥거렸다. 나는 내가 예쁘다고 느끼는 어떤 것에 대해 그렇다고 표현하는 것이 남에게 핀잔받을 일인가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나는 에게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믿으면 되는 것이고, 내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굳이 납득시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더 흥분한 그는  누가 봐도 본인과 다른 예시를 든 사람들'객관적으로' 못생겼다고 알고 있으므로 못생긴 것이고, 그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어떤 면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가 하는 말만 들으면 논리적으로는 어이가 없으나, 그 내면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그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콤플렉스적인 일면이었다. 그에게는 심각한 외모적 콤플렉스가 제삼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신경 쓸 가치조차도 없이 간단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막상 내가 1인칭 시점이 되면 그것이 헤어날 수 없는 복잡한 콤플렉스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백가지 긍정적인 일면보다 한 두 가지 부정적인 면에 꽂히듯 몰입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나는 그의 심정을 헤아려 그 별것 아닌 것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가능한 중립적인 톤으로 갖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은 잘 되지 않았다.


1. 당신은 '객관적으로' 못생겼나요?

2. 객관적으로 잘생긴 사람은 누구인가요?


생각보다 첫 번째 질문에 쉽게 답변을 하거나, 두 번째 답변도 일치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스스로가 못생겼는지 잘생겼는지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답은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 스스로는 어떨 때는 이뻐 보이고 어쩔 때는 절망적으로 못생겨 보이기도 한다. 그건 남들의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못생겼다고 하는 부분을 예쁜 것으로 인지하는 문화에도 가 봤고, 한 문화 안에서도 예쁘다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가끔 목둘레에 둥그렇게 지퍼가 달려있다면 목 위에 있는 부분을 떼어서 집어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매일 내 머리통의 모양을 선택할 수 있다면 옷장에 머리통 컬렉션을 만들어서 외출할 때마다 갈아서 끼우고 나가는 상상도 해본다. 그래도 누군가 내 머리통과 자신의 머리통을 바꾸자고 요청을 해온다면, 아직은 내 머리통을 선택할 것 같다. 머리통 윗부분을 조금 작고 동그랗게 깎아서 다듬을 수 있으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말이다.


누군가가 예쁘고 못생겼다는 것은 물리적 비율 관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 행동, 문화적 수용성과 연루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것에서 '객관적, 수치적, 논리적, 통계적' 기준을 찾을 이유도, 찾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치 이런 기준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주로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의 투덜거림을 외부에서 보면서 나는 나도 가지고 있던, 이제 생각해 보면 어이없늗 자잘한 콤플렉스를 발견하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했던 나의 콤플렉스를 헤어날 수 있었다. 콤플렉스란 벗어나고 보면 그 실체가 어이없이 보잘것없는 것이라 화가 날 지경이지만, 이를 벗어나기란 쉬울 것 같지만 쉽지가 않다. '내가 저랬었구나. 어이없을 정도로 별개 아니었구나.' 나도 그런 적이 있었던 그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언젠가는 내가 본 것을 그도 다른 사람을 통해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외모라는 것은 모두 다르게 생긴 것인데 굳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자신의 이상으로 자신을 부정적으로 괴롭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눈을 뜨게 되니 정말 모든 것이 나름의 비교불가능한 개성이 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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