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새들은 왜 날지 않을까?
작품 속에서 나를 찾아보기
올 해도 한 자리에서 60개에 달하는 캔버스를 한 달도 채 안 돼서 벌써 다 끝내 버렸다. 지난 7월 말부터 마치 식음을 전폐하듯 나에게 몰입해서 뜨거운 여름날을 나의 세상 속으로 휴가를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휴가처는 나의 작업실에 달린 포털을 통해 내 안으로 잠입해 가는 세계이다. 하지만 나는 자폐증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문을 안에서 잠그기도 하지만, 원할 때마다 밖으로 자유롭게 드나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은 외부의 세계를 내 안으로 들여오거나 누군가를 초대하기도 한다. 매우 자주 아무나 초대해서 토악질을 해대며 외부의 오염물질을 뱉어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작품을 정신없이 하고 나서 또 재미나는 순간은 그간 만든 작품을 다 꺼내놓고 한 자리에서 보는 것이다. 나는 아무도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없지만, 내가 나를 쫓아서 저만큼 달아나 버리는 영감의 속도에 따라 질주를 하는 편이다.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자다가도 몇 번씩 깬다. 아이디어가 시도 때도 없이 불현듯 출현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던 것이 작품으로 가시화되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글의 마지막 장을 다 써놓고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는 시간이랄까? 얼추 작품이 완성되어 사방에 쌓여있는 것들을 전부 다 늘어놓고 보면 나의 내면의 여정도 보이고, 내 모습과 나의 감정, 내가 집중하고 있는 것들을 나의 밖에서 볼 수 있다.
작업의 출발지점에서 그렸던 여덟 마리의 새를 한 곳에 따로 모아보니, 의문이 생겼다. 내가 그린 새들은 다들 두 발로 걷고 있다. 아, 이 중 한 마리는 다리가 세 개 달렸다. 뭐, 상상 속의 생물을 현실 세계의 자연법칙으로 재단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내 세상의 새는 다리가 세 개여도 상관이 없다. 내 맘이다. 생각해 보니 몇 년 전 드로잉 프로젝트에서도 새를 딱 한 마리 그린 적이 있는 게 생각이 났는데, 그 새도 상상 속의 타조였다. 현실에서도 상상 속에서도 그 새는 날지를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아홉 마리의 새가 모두 그냥 제 자리에 날개를 접고 있다. 꼭 날아다녀야만 새가 아닌 건 맞는데, 날지 않고 서 있는 새들을 보니 조금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오래전 내가 쓴 시도 생각이 났다. 그 시는 이렇다.
<창백한 호수> 중에서...
......(생략)
나는 다시 굴러서
이마 위의 뾰족한 것에 닿는다
잠자는 커다란 새의 부리
다시 옆으로 굴러
구부러진 것에 닿는다
커다란 새의 발톱
나는 멈춰있는 새의 빽빽한 갈색 깃털 위에 놓여있다
그런데 나는 무섭지 않다
그 위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내 혼란스러운 의식만 깨어있는 중
나는 일어서는 방법에 대한 기억이 없다
2017년 출간 <바보 book>에 게재한 시에서 발췌
심지어는 이 시 속에 등장하는 아주 커다란 새는 서 있지도 못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누워있는 것이다.
나는 날지 못하는 새인가? 나의 날개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된 걸까? 그런데 아직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 나의 세상 속에서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날지 못하고 있는 새인지도 모른다. 눈도 너무 작아서 너무 순해 보인다. 조금 성형수술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쌍꺼풀도 그려주고 '앞트임', '뒤트임'도 해서 눈의 크기를 조금씩 크게 그려주었다. "봐, 보라고!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라고!" 그래도 순해 보인다. 새의 눈이 개구리처럼 커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새들이 내게 말한다. "날아가는 법을 알려줬으면 좋겠어!"
글쎄, 나도 모르겠다. 정박해 있는 멋진 배처럼, 나의 새들은 날아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도 날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