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영감이라는 것

조급해하지 않는 것

by 이영선

2023년 다시 또 다른 드로잉 프로젝트가 작은 지원 건에 선정되었다. 2022년보다 약간 더 재료비를 책정할 수 있게 되었고, 이번 프로젝트는 결과물의 발표까지 이어진다. 나는 캔버스 수량을 왕창 늘려서 근 60개를 신청했다. 2022년 프로젝트를 마치고 한동안 움직임을 만드는데 집중했는데, 자꾸만 그리고 싶은 이미지들이 떠올랐고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나는 드로잉과 창작글을 매개로 하는 다원예술 프로젝트에 선정되었다. 프로젝트는 현재 시점으로 계속 진행 중이고, 이 과정의 기록과 함께 어떤 결과로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들이 달아나지 않게 지원금의 교부신청을 서두르면서, 주문한 캔버스만 받으면 바로 내 안의 이미지들을 온갖 상상의 색채로 토해낼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에 차올랐다. 창작을 하는 예술가로서 나는 영감이 없는 날은 작업의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지 못한다. 재료가 많고 시간이 많다고 작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영감이 차올라서 작업을 하는 시간이 5-10%라면 나머지 90%의 시간에 대해서는 낚싯줄을 강에 드리우고 마냥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저 기다려야 한다. 그런 기다림이나 노는 시간은 창의적인 영감에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소위 말해서 그냥 폼만 잡고 허송세월만 보내는 게으르거나 비효율적인 시간이 아니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작업을 하는 중인데 남이 보면 멍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영감이 없이 무언가를 부지런히 끄적인다고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작업이야말로 재료비와 시간을 낭비하는 아주 비효율적인 것이다. 예술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조상품의 공정과는 다르다. 점을 하나 찍으려고 해도 시간과 생각과 내면의 충분한 성숙에 의해 그려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봐도 그 점에는 아무런 울림도 느낌도 없다. 꼭 점을 찍어야 하는 필요가 꽉 차 올랐을 때 그 점이 내 손을 빌어 찍어지는 느낌이라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오래전 잠깐 회사에 다니면서 일을 끝마치자마자 그림을 그리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도 작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가능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다. 두 개의 세계가 내면에서 충돌을 하면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나드는데 그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그건 마치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이 들고 비효율적이다. 영감이 꼭 그 시간에만 규칙적으로 찾아와서 '나를 데려다 쓰라'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에 이를 잡아 끄집어내지 않으면 영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나중을 위해서 아무리 기록을 하고 스케치를 해 놓아도 무언가 빠져나가버린 듯한 기록은 무언가를 담고 있기가 힘들다. 교부신청의 행정 절차가 선정 이후로도 몇 달은 걸리기 때문에 그간 그 영감이 사라지지 않도록 꼭 붙잡고 있어야 하는데 막상 캔버스가 도착할 무렵쯤이 되니, 그렇게 터져 나올 것 같은 이미지들에 어떤 당위성 같은 게 희미해졌다. 난감했다. 몇 십 개라도 당장 그려내야 할 것 같았는데 너무 참았더니 배고픔이 사라진 것 같이 무감각한 느낌이랄까. 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 뭐 그려?"


나의 사랑하는 친구는 내가 작업의 과정 중에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 나에게 숨통을 내어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친구가 답을 주거나 직접적인 과정에 대한 개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내가 막힌 숨을 내어 쉴 때 거기에 친히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정말 중요한 존재이다. 나는 대놓고 친구에게 내가 창작에 돌입할 때에는 나로부터 멀리 도망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을 한다. 친구는 깔깔거리며 조급해하지 말라는 한결같은 조언을 하며 나의 속도를 조절하며 안도감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작가가 말하길 "영감이란 잠깐 열리다가 닫히는 문"이란 표현을 한다. 난 이 말에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 영감은 잠깐 열렸다가 정말 사라진다. 그 순간을 놓치면 정말 머리를 땅에 박고 싶은 심정이 든다. 분명 머릿속에 갖가지 새들이 날아다녀서 그걸 잡아서 하나둘 씩 내어놓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새들은 분명히 날고는 있지만 몇 달 전의 그런 싱싱하게 살아있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새들을 내 상상 속에서 여덟 마리나 끄집어내었다. 왜 새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새를 싫어하는데, 갖가지 새들이 내 머릿속에서 날아다녔다. 아마도 뭔가 자유롭고 싶은 나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 08화자연에서 배운 색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