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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바보 book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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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Nov 05. 2024

검은 드로잉

그때 난, 

커다란 고래의 뱃속에 갇혀버렸다. 

나는 이곳에 스스로 들어왔다. 

잠시 아무도 모르게 쉬다가 

다시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동안 

커다란 암흑의 고래가 항해를 시작했던 걸 몰랐다. 

저보다 더 깊은 암흑의 바닷속으로 

밖에도 안에도 온통 암흑뿐인 세계에서 

자기 눈도 퇴화되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고래가

목적 없는 항해를 하고 있다. 


이곳에는 빛이 없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윤곽만 희미한 빛처럼 가끔 떠올랐다 사라지는

기억의 잔영에 대한 기억뿐 


가끔 나는 전구 하나를 켜는 상상을 한다. 

그렇지만 그 전구는 빛이 아니다. 

그리고 그 빛은 아무것도 밝힐 수 없다. 

나는 상상 속의 전구를 꺼버린다. 


어둠만 존재하는 이곳에서

꿈과 현실이

안과 밖이

낮과 밤이

시간의 흐름이 하나로 엉켜져

서로 분간할 수 없는 괴이한 형체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죽음일까 아니면 삶일까

고래의 항해는 시간을 밀고 가지 않는다. 

고래는 가는데 아무것도 전진하지 않는다. 

그것은 앞이기도 하고 뒤이기도 하다. 


나는 검은 암흑 조각 하나를 오려낸다. 

그 위에 어둡게 빛나는 기억의 잔영에 대한 기억을 그린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기억일까

실체 없는 기억과 같은 기억에 살이 붙더니

아주 미약하고 작은 실체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더 이전의 꿈속에서 내가 잡은 커다란 물고기

이것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린 나무

이것은 아담을 꾀었던 꽃 뱀

이것은 내가 좋아했던 달팽이

울타리를 뛰쳐나오는 미친 돼지들

어둡고 차가운 바다에 아이를 떠나보낸 

산산이 부서져버린 슬픈 마음들

하늘보다 더 커 보이던 상상 속의 타조


어둠을 자꾸만 오리다 보면 

고래가 어둠에 점점 녹아 버리면

그래서 이 어둠이 동이 나면 


나는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Black Drawing

                                                                   Written by Young Sun Lee


And then, 

I was locked inside this big whale.

I came in here by myself.  

Taking a break for a while without letting anyone know,

I was thinking of going out again.

I thought I could. 


But while I was here, 

I didn’t realize this gigantic dark animal started its journey.

Into the deeper darkness of the sea than the dark whale itself,

In a world full of darkness everywhere,

The whale whose eyes have already degenerated and can see nothing

Is taking me on an aimless journey. 


There is no light here.

The only thing that can be seen is

The memory of the residue of older memories

Which sometimes float up like the contour of dim light.


I often imagine turning on a light bulb. 

However, that is nothing like light. 

And that light cannot shine on anything. 

I turn off the light in my imagination. 


In the place where darkness only exists, 

Dream and reality,

Inside and outside,

Day and night, 

And the flow of time have been entangled all together, 

Creating a monstrous shape that cannot be told apart.


Is this death or life?

The journey of the whale doesn’t push time forward. 

Nothing moves forward though the whale travels.

It can be forward or backward.


I cut a piece of vast darkness. 

And I draw the memory of the residue of a memory of a glimmer of light.

What might be this memory about?

Soon the incorporeal memory begins to flesh up. 

It has become a feeble and tiny substantial entity.  


This is a big fish that I caught in my old dream.

This is a tree with eyes that are looking at me.

This is a snake that once seduced Adam.

This is a snail that I like. 

These are crazy hogs that are breaking out of the pigpen. 

These are sad pieces of broken hearts.

After having to send their beloved children to the cold sea.

And this is an imaginary ostrich that looked taller than the sky.


If I kept cutting darkness into pieces, 

If this whale melted away into darkness,

So, if the sea ran out the darkness, 


Could I be out of this whale? 


어둠을 오려서 그린 내 드로잉 조각들 (작품은 조각이라기보다 다 큼지막함). copyrighted by 이영선


*노트: 

살면서 한 번씩은 헤어 나올 수 없는 혼자만의 어둠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납득할 수 없는 그 어둠이 무섭고 화가 나지만, 심연의 어둠 속 더 깊은 곳에 도달해 보면 순수한 본질, 자아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외면의 자아가 내면의 자아와 너무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을 때,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고 있을 때 우리의 자아는 어둠의 터널과 겹겹이 쌓인 껍질을 뚫고 우리를 심연으로 불러들인다. 


흔히 말하는 동굴, 심연, 터널, 자궁 등이 모두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말일 것이다. 그곳의 어둠은 때로는 상처를 보듬고 약자를 보호하며 삶을 더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안정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몹시도 벗어나고픈 삶의 무게와 공포를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언젠가는 그 터널을 지나 세상의 밝은 빛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영화에서처럼 모두가 그 어둠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발버둥을 칠 때마다 어둠은 우리를 더욱 깊은 절망감 속으로 빠져들게 할 수도 것이다. 스스로 어둠 속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정작 나가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그 심연의 어둠을 벗어나는 문을 찾는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어둠에도 자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은 우리가 원한다고 쉽게 그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나도 어느 순간 스스로 어둠 속으로 찾아들었다. 잠시 쉬려고 들른 어둠이 자기만의 항해를 시작했을 때 어둠은 그저 서둘러 벗어나야만 하는 공포와 위협이었다. 어디에도 없는 문을 찾기 위해 조급하게 헤매다 지쳤을 무렵 뒤돌아서 있는 어둠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어둠은 그저 어둠일 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는 이를 벗어나려는 발길질을 하기보다는 어둠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 어둠을 조각내어 그림을 그리고, 어둠을 조명삼아 춤을 추었다. 문득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들을 영감으로 삼아 또한 어둠에서 뽑아낸 먹물로 글을 쓰며 작가의 여정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로 전시를 열고 춤을 추어 관객들을 초대했다. 


어둠은 우리를 움켜잡지 않는다. 어둠과 우리는 그저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 공존할 뿐이다. 지금 속해 있는 곳이 어둠이라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즐길 수 있다면 오히려 그때부터 어둠은 지쳐서 우리로부터 희미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각자의 어둠을 재료로 삼아 글을 쓰고, 상상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위의 시 <검은 드로잉>은 내가 만든 동일 제목의 책 <검은 드로잉>에 수록한 시이다. 

<검은 드로잉>은 내가 안무 창작 과정에서 기록했던 낙서, 드로잉, 스케치들을 엮어서 만든 창작 드로잉과 글 모음집이다. 장르를 굳이 말하자면, 그냥 영선아트북이다. 시와, 그림, 고백과 춤,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한마디로 자유하다. 


이 책은 말없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만들어졌다. 우리는 대부분 증명하고, 설명하고, 납득시키고, 분류해야 하는 ‘말 많은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말은 3차원이상의 세상을 표현해주지 못하며 자기모순에 빠지게 할 뿐이다. 마음, 무의식, 우연, 꿈, 기억, 망각, 변형, 연상, 직관, 등의 논리는 말 많은 세상의 논리보다 본질에 더욱 빨리 다가가게 만들고 말을 못 하는 것들과의 소통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책은 읽는 이의 시간과 공간적 여유를 필요로 한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내면에서 나온 무언가가 책의 여백을 채우게 될 것이다. 책은 읽는 이를 춤추고, 만들고, 그리고, 소리를 듣고, 글을 쓰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래도 아무것도 전달되는 것이 없다면 책을 덮고 차라리 커다란 나무 앞에 서서 나무와 이야기를 해보는 게 나을 것이다. 나무와 이야기하는 법을 알게 된다면 그제야 비로소 세상의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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