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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페어란 무엇인가? (5)

여백의 시간들

by 이영선

참가 기간 중 별 일들이 많았다. 유튜브나 인터넷으로 살펴본 사전 조사과정 중에는, 아트페어에 가면 많은 갤러리들이 작가와 작품을 찾으러 다닐 것이고, 많은 작가들과의 교류와 관객들의 피드백이 있을 것이라는 등의 뭔가 그럴싸한 얘기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4일 내내 호텔에 있기로 하고, 자리를 비울세라 작품 앞을 지켰다. 정작 그런 작가는 그 부스에서 나밖에 없었고, 대부분 하루나 이틀 정도 얼굴만 내비치거나 작품만 보내고 아예 오지 않았다. 그랬더니 갤러리 관장이 나를 무슨 다루기 쉬운 '시다(보조스텝)'정도로 여기는 부분이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니라 한 작가와는 격한 언쟁도 있었다. 그게 단순히 상대적으로 고령인 그의 나이에서 비롯된 세대차이인지 이쪽 세계의 오랜 관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은 MZ세대가 등장하는 2025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고 불편감을 아직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불쾌지수가 높아져가고 있었다.


나는 특별히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천성적으로 친절하다. 그리고 상황 판단도 빨라서 시키지 않은 일도 알아서 진심으로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대부분 나와 일하는 상대는 나를 점점 좋아하게 되지만, 그러는 동안 나는 무능함을 보이기 시작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대략 3일이 걸린다, 상대를 계속 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 말이다. 나는 내게 긍정적으로 도전적인 일과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야 내가 성장할 수 있고, 그 일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문제는 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의 배려과 존중과 공감을 당연시 여기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마냥 친절하기만 한 바보인 줄 알고 무례하게 굴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선을 넘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살고 친절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즉, 상대에 대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지없이 나의 진심으로 친절하고 싶은 마음을 건드리며 상처를 준다.


나는 이 행사를 마치 신성한 무대에 서는 공연자처럼 생각했다. 나는 무대에 설 때 늘 그런 상태로 작품과 무대를 대하기 때문이다. 뭔가 잘 보여주고 싶었고, 드디어 나와 작품이 알려지는 자리가 온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실제는 무대에 노래하러 의상까지 잘 차려입고 나온 성악가한테 무대감독이 무대 의자 좀 저리 치우고, 무대에 걸레질을 해달라는 꼴이었다. 여러 예술계를 거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어서 황당하기까지 했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나의 무대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아트페어에 대한 기대감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연애스토리와 비슷했다. 실제로는 먹고 사느라 직장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무실에서처럼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만, 다닥다닥 벽에 작은 소품들을 걸어놓고 뭘 자꾸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살 의향이 없어 보이는 관람객에게는 갤러리 측에서도 굳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즈음 전국으로 퍼져나간 산불로 인한 건지, 불경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예년보다 참가 갤러리도 관람객도 상당히 줄어든 모습이라고 했다. 갤러리 관장은 부스 안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연신 사람들이 사 온 김밥을 먹었으며, 처음엔 이런 게 뭔가 상황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으나, 모든 걸 내려놓게 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나도 덩달아 떡 팔러 온 아줌마의 옆에 앉아 뭔가를 주워 먹는 코 묻은 어린애와 같은 그런 편안한 자세로 같이 김밥을 주워 먹고 오렌지를 까먹으면서, 나의 앞날에 대한 상상과 고민에 몰입했다. '에라 모르겠다, 아, 망했네, 이것도 아니네!'란 생각이 머릿속에 지배한 지 이미 오래였다. 나를 구매자로도 상상해 봤다. 돈이 있어도 별로 사고 싶은 것이 없었다. 함부로 말하긴 그렇지만, 차라리 아이패드 신모델을 사거나, 집에 가구를 들이거나,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가족이라면 사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모르겠다. 뭔가 자꾸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뭔가 아니었다. 예술인 듯, 예술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간 치열하게 살며 예술이라고 믿어온 그런 것들의 아우라는 이런 모습들이 아니었다.


내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들도 더러 있었고, 뭔가를 조사하듯이 연신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간혹 작품에 대해 묻는 관객들도 있었다. 작품 사진을 찍어가서 누군가 내 작품을 비슷하게 따라 하면 어떻게 할까라는 우려도 했지만, 내가 이 행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전시장에서의 지루한 시간과 혼자만의 명상, 공상, 정체성에 대한 사색의 순간을 오고 갔다. 나쁘지는 않았다. 원래 멍 때리며 머릿속의 상상에 몰입하는 건 나의 특기이고, 이전에 시도해보고자 했던 진로의 탐색 현장에서 나의 정체성과 나의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탐색하는 건 매우 적절해 보였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그래도 되는 커다란 카페에서 럭셔리한 여유시간을 갖는 것으로 치면 매우 좋았다. 앞으로 인생에서 하지 않아야 할 것, 할 수 있을 것, 해도 될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생겨나고 정리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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