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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를 하고, 준비를 버리다

by 이영선

"일은 항상 예정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이전에는 내가 계획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제는 세상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일을 계획한다. 그래도 예민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에 일의 긴장과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 하면 온 우주가 나를 방해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번에는 예상밖의 관세와 운송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해외 전시 과정에 대해 아무도 내게 도움을 주거나 공개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둠 속을 더듬듯이 정보를 검색했다. 그 과정을 거쳐 출국 두 달 전쯤 미리 운송업체를 수소문하고 견적과 배송방법을 알아 두었다. 그에 따라 9월이 다 되어 출국 며칠 전에 연락해서 작품을 배송하면 되겠지 하며, 여행 가방의 짐을 싸는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거기까지도 힘이 들긴 했는데, 작품의 사이즈 때문이었다.


알아보니 큰 작품은 우체국 EMS로도 배송이 안되고, 프리미엄 배송을 이용해야 하는데 배송비와 포장비가 거의 다섯 배 이상까지 뛰었다. 지방 우체국에서는 이런 업무도 불가하여 인천이나 서울로 작품을 직접 배송해야 하는 수고와 비용도 추가해야 했다. 작품의 사이즈가 몇 센티만 작았어도 편하고 저렴한 우체국 배송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기에 조금 아쉬웠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관세 정책의 변화로 시스템 대처를 하지 못해 우체국은 물론 일부 큰 운송업체에 의한 소형화물의 운송이 잠정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 또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페스티벌 지원 당시에 매칭이 들어올 거라는 큰 기대 없이 그냥 내가 올리고 싶은 작품을 지원 웹사이트에 올렸다. 온라인상의 작품이미지만으로는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어차피 매칭이 안 될 것이라고 미리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광색의 물감을 쓰고, 배경이 채색되어 있지 않은 내 그림은,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그 색감과 느낌을 잘 전달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했던 이유는 큰 페스티벌 사이트에 작품과 정보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국외 관련자들에게 내 존재를 노출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명한 사진이 아니더라도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연륜 있는 누군가는 거기에 적어 놓은 웹 포트폴리오 링크를 누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래서 작품의 사이즈와 배송까지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작은 작품으로의 변경을 요청해 볼까 했는데, 내가 비용을 절감하러 페스티벌에 참여하려는 게 아니라 알리고 싶은 작품을 전시하는 게 목적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나무라며 원래 제시한 작품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편안하려면 그냥 작업실에서 잠이나 자야지, 전시 자체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작품을 보내려고 한 시기와 맞물려 관세와 비자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건 단순히 관세를 더 내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물품의 수신인이 관세를 부담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다시 작품을 국내로 반입할 때에도 관세를 부과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작품이 현지에서 혹여라도 판매가 되거나 새로운 주인을 만나면 나의 여행은 해석에 따라 별도의 비자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판매를 위한 전시나 여행이 아니었지만, 그에 따른 판단은 잘 알려졌다시피 이를 해석하는 사람의 재량이었다. 예술가가 작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를 판매를 위한 행위라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이에 대해 반박을 할 근거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였고, 내게 그런 결정을 할 힘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논란의 여지를 다 없애기 위해, 소량의 명함 이외에는 준비하려던 엽서나 소개장 같은 홍보물도 모두 취소했다. 정말 결국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나의 존재만 가지고 여정을 꾸리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진정한 준비란 모든 것을 검토한 후에 가능한 모든 것을 다 버린 상태라고 생각을 했다.


세상은 참 어렵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때에도 모호한 결정을 해야 할 때에는 왜 사전에 의학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 자책이 되었는데, 이젠 왜 나는 법조인이 되는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 자책이 되었다. 세상은 참 모호한 결정들의 집합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예 출발 전부터 전시물을 다시 되가져오는 조건으로 운송을 예약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혹시라도 현지에서 누군가 작품을 원하는 경우에는 원래 내야 하는 관세의 몇 배를 벌금처럼 부담해야 하거나 아예 국내로 다시 가져와서 이후 다시 현지로 배송하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갤러리와 갤러리스트로 이루어지는 주류의 예술관행에 반해 도시 전체가 갤러리가 되어 좀 더 실험적이고 포용적인 예술과 대중의 참여로 민주적인 예술의 장을 연다는 이 페스티벌의 색다른 기획의도가 한편으로는 갤러리시스템의 부재로 관세나 비자 등의 제도적 행정절차에서는 더 까다롭고 복잡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는 것이다. 역시 실험적이고 새로운 것은 기존 제도와의 조율 문제와 필요선인 불편함을 야기시키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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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쓰고 그리고 만드는 통합창작예술가. 장르와 경계를 녹여내어 없던 세상을 만들고 확장하는 자. 그 세상의 이름은 이영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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