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체크리스트에 적히지 않는다

Part 3. 루틴은 답이 아니었다

by youngvocati

나는 답을 찾고 싶었다.

루틴이 아니라면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그 두려움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집요하게 루틴을 붙잡았다.

마치 하루를 버텼다는 증거라도 되듯,

체크리스트에 흔적을 남기면 안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빈칸을 메우듯 줄마다 표시를 채워 나가면,

오늘도 무사히 살아냈다는 위로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종이 위의 흔적은 늘어났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성취는 눈앞에 있었지만,

감정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나는 자주 모순 속에 빠졌다.

루틴을 완벽히 지켜낸 날조차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반대로 지키지 못한 날,

기록에 남은 것은 실패의 흔적이었지만

그날의 감정은 반드시 무너짐만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몸이 무너져 더는 버틸 수 없다는 포기였고,

어떤 날은 작은 위로를 찾고 싶어

스스로에게 허락한 휴식이었다.

그러나 종이에 남은 것은 단순한 기호뿐이었다.

그 작은 표시들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는지 말해주지 못했다.

결국 기록은 나를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감정을 지워버렸다.


늦게야 깨달았다.

루틴은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장치였지만,

동시에 나의 감정을 설명해 줄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나는 왜 이렇게 지쳤는지,

무엇 때문에 무너졌는지,

어디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지를

루틴은 알려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루틴에 나의 전부를 기대고 있었다.

그래서 루틴이 감정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안에는 커다란 상실감이 밀려왔다.


부모님에게도 나는 늘 말만 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이제는 바뀔 거야.”

그러나 지켜내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반복된 실패와 변명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나는 스스로를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 믿음은 깊게 박혀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체크리스트에 집착하게 되었다.

적어도 종이에 남은 기록만큼은 지워지지 않으니까.

내가 무너져도 흔적은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그 흔적은 위로가 아니라,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나는 알았다.

체크리스트는 나를 지켜내는 도구가 아니라,

때로는 나를 압박하는 감옥이었다.

“오늘도 지켰다.”라는 기록은 남았지만,

그 기록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는지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버텼지만, 나를 돌보지는 못했다.

살아냈지만, 살아낸 이유를 잃어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체크리스트를 채우려 했다.

감정을 기록할 언어가 없으니,

최소한의 형식이라도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켜낸 흔적만으로는 공허가 채워지지 않았다.

루틴의 칸은 점점 늘어났지만,

내 마음은 줄어만 갔다.

나는 더 많은 기록을 쌓아 올렸지만,

정작 그 위에는 감정의 무게가 놓여 있지 않았다.

그날의 눈물,

그날의 공포,

그날의 외로움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마치 내가 살아온 하루가 아닌 것처럼

기록에서 지워졌다.


그 순간 나는 깊게 깨달았다.

루틴은 나의 마음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어떻게 버텼는지,

어디에서 무너졌는지는

체크리스트에 적히지 않았다.

결국 감정을 비껴간 루틴은 껍데기뿐이었다.


나는 종이 위에 표시를 남기면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며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지만,

결국 루틴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감정이 빠진 루틴은 돌봄이 아니었고,

나를 위한 증거도 아니었다.

그저 공허를 덮는 얇은 종잇장일 뿐이었다.


체크리스트 위의 기록은 내 하루를 증명했지만,

그 속에서 자라난 것은 위로가 아니라 균열이었다.

공허는 그 틈새를 파고들며 점점 더 커져 갔다.

나는 알았다.

루틴은 내 감정을 품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루틴 너머의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루틴을 넘어, 나를 지켜줄 새로운 언어.

그것이 감정의 기록일지,

혹은 다른 방식의 돌봄일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감정을 비껴간 루틴만으로는

나는 나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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