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1장. 네 번째 만남
네 번째 만남이 있던 5월의 어느 날, 효영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헤어졌던 여자친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던 것이다. 다시 시작하자는 짧은 메시지였다. 효영은 망설였다. 이런 일이 혹시 생기진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모임 하루 전날 밤 카톡이 왔던 것이다. 선뜻 답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글쓰기로 인해 이별의 상처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메시지는 효영을 크게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혼자인 것에 어느 정도 적응해 나가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주연의 메시지가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왔었더라면 어땠을까 효영은 생각했다. 그만큼 효영은 내면에서부터의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겪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효영은 카페 문을 열었다.
늘 앉던 자리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자리를 찾으려 고개를 돌렸는데 이미 유경이 와 있었다. 유경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효영은 예의상 살짝 미소를 지었을 뿐 무거운 마음 때문에 환하게 응대할 수 없었다. 유경이 물었다. 효영아, 너 무슨 일 있어? 얼굴이 까매. 아… 어쩌냐… 주연이에게서 연락이 왔어. 다시 시작하쟤. 그때 동수가 불쑥 들어왔다. 너네 둘 뭐가 그리 진지해? 야, 덥다. 뭐 좀 마시자. 내가 살게. 동수는 효영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떠들다가 효영과 눈이 마주쳤다. 무, 무슨 일 있는 거지? 주연이에게 연락이라도 왔냐? 효영보다 유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어떻게… 뭐야? 진짜야? 동수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효영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함부로 주연이 이름을 말한 것에 대해 살짝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함부로 넘겨짚은 게 사실로 드러나 놀랐던 것이다. 그래도 물었다. 진짜야? 효영아? 응… 효영은 한숨을 크게 쉬며 대답했다.
덥다며 호들갑을 떨던 동수가 경솔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동수는 주연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할 거니? 모르겠어. 정말… 효영이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쉽지 않다. 정말… 유경이 거들었다. 유경도 주연이를 잘 아는 터라 효영은 유경과 동수에게 별 다른 설명을 곁들일 필요가 없었다. 효영과 6년이 넘게 사귄 주연은 폐쇄적인 성격이었다. 주연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효영은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을 모두 끊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오해를 했지만 유경은 그 문제가 효영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둘 사이의 관계가 건강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경은 효영의 이별 소식이 단순히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글쓰기를 함께 하며 지낸 지난 몇 달간 효영의 변화가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주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염려가 되었다. 동수가 일단 마실 거나 시키고 찬찬히 얘기하자고 말하며 각자의 주문을 받은 후 카운터를 향했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이 올라와 있었다. 나오자마자 동수는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좋은 생각이 났다며 말을 시작했다. 우선 효영이 문제는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야. 이번에 내가 너네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글쓰기 주제로 글을 쓰면서 좀 더 생각해 봐도 되지 않을까 해. 나도 정확하게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왠지 이번 주제로 글을 쓰다 보면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유경이 어떤 주제길래 그러니? 하며 물었다. 모두 사람에 관련된 주제야. 하나는 ‘나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야. ‘나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나서 선택하는 끌림을 말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인 끌림을 말해. 왜 있잖아. 어떤 사람 보면 그냥 끌릴 때가 있고, 또 어떤 사람 보면 그냥 싫을 때가 있잖아. 이 주제로 자신의 본능적인 부분을 성찰해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그 반대의 주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냥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떠올려도 될 것 같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가치관과 대립되는 유형의 사람을 그려도 되고. 각자 이 두 주제로 글을 다 써도 되고, 하나씩 골라서 써도 돼. 나는 둘 다 쓸게.
효영은 동수의 말이 마치 물속에서 웅웅 대는 소리처럼 들렸으나 효영의 마음은 이미 두 번째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자아가 둘로 분리된 듯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최근에 글쓰기 덕분에 맛본,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해방감을 다시 맛보고 싶은 자아가 이미 효영 안엔 든든히 자리 잡고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효영은 이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빠른 판단을 할 수 없을 바엔 다른 일에 집중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경솔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효영은 유경보다 먼저 말했다. 나는 두 번째 주제로 쓸게. 유경은 그럼, 나는 첫 번째 주제로 써볼게,라고 말하며 동수를 쳐다봤다.
그날 저녁은 효영의 옛이야기를 듣느라 셋은 저녁 시간까지 카페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면서도 언제나 들으면 새롭게 들리기 마련이다. 효영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자기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유경과 동수가 고마웠다. 주연과 함께 있을 때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받는다는 게 이렇게 위로가 되는지 이전에는 몰랐다. 효영은 집으로 돌아가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주연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 속에서 행복했던가? 그렇다면 왜 나는 주연의 메시지에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걸까? 과연 내가 주연에게 쏟았던 모든 것들은 사랑이었을까? 답도 없는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헬스장을 향했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좀 더 많은 시간 땀을 흘렸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다가 피곤해서 지쳐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