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0장. 내가 가장 바보처럼 느껴질 때
효영은 동수가 버스 타기 직전에 말한 글쓰기 주제에서 바보라는 단어에 꽂혔다. 그렇잖아도 그 어느 때보다 요즈음 자신을 바보처럼 느끼고 있었고, 그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을 글로 써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어릴 적 겪었던 트라우마가 글쓰기로 정리되었을 때 느꼈던 치유의 힘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동수가 그 글쓰기 주제를 말하는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세 번째 만남을 가졌던 날 밤 집에 오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유경 역시 집에 오자마자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걸 확인하고는 홀로 거실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다 책상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적도 있었고, 남편이 새벽에 나와 잠이 든 아내를 안고 침대에 눕혀 준 적도 있었다. 그러기를 열흘 정도 했을 때 유경은 더 이상 글이 객관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손에서 글을 놔버렸다. 그때 마침 효영이 글을 먼저 올린 것을 확인했다. 세 번째 만남 후 2주가 막 지나던 날이었다. 효영이 올린 글은 다음과 같았다.
여유를 가지고
상대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입는다. 상처를 입지 않는 방법은 없다. 다만 저마다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 자리에서 호탕하게 할 말을 다 해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혼자 곱씹으며 억울해하고 분해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누군가 나에게 곱지 못한 말투로 한마디 하면, 머리가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대꾸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 오해이고 내 입장을 똑바로 설명하고도 싶은데, 끝내 입을 떼지 못한다. 그러고는 집에 가서야 뒤늦게 해야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샘솟듯이 차오른다. 왜 그 순간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후회하며 그 상황을 자꾸 되뇐다.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질 때다.
나의 입장과 생각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다. 그리고 반박하지 못함으로써 상대방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려 자존심이 상한다. 연민과 자책 이후 이어진 감정은, 다음번에는 맞받아쳐주겠다는 증오 어린 복수심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받은 상처를 상대에게 돌려주지 못해서 분노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상대가 던진 돌을 똑같이 던질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겪고 나서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이런 결정을 내렸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비난받거나 꾸지람 들을 만한 상황을 최대한 만들지 말자'라고. '착한 사람'으로 위장하는 이 방법은 꽤 효과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법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위장이었고 나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모든 이들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타인의 기준을 조정할 수도, 나를 향한 타인의 판단을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통제할 수 있다. 타인의 판단과 조언, 비난을 듣는 나의 마음 말이다. 물론 마음을 통제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의견을 당당히 표출해야 하고, 잘 안된다면 그렇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봐야 한다. 가만히 무시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어떤 부분에서는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다. 매번 자신의 입장을 두둔하고, 모순된 것을 미화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항상 내가 옳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면, 이제는 나의 마음을 다스릴 차례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의미는 상대의 말을 그저 무시하라는 의미도, 무작정 스스로를 위로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이는 회피에 가깝고 회피는 답이 될 수 없다.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이는 관계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주인으로서 상대에게 그렇게 말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는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양측 모두에게 자유를 선언하는 이 방법은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낸다. 타인과 나 그리고 상황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 만든다. 이제는 설사 대꾸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할 말이 생각나면 하는 것이고, 생각나지 않으면 마는 것이다. 더 이상 해야 할 말을, 하고 싶은 말을 찾으려 애쓸 필요도, 찾지 못해서 답답해할 이유도 없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여유가 아니었나 싶다. 관계에서 상처받는다면, 우선 나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건 아닐지 되돌아보아야겠다. 어쩌면 내게 날아온 돌은 돌이 아닐지도 모르니 말이다.
효영의 글을 읽고 유경은 효영이 자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댓글을 남겼다.
내 얘기를 읽듯이 읽었어. 내 속마음을 잘 풀어주셔서 고마울 정도로. 맞아. 여유가 중요한 것 같아. 나를 돌아볼 여유, 조금 물러서서 상대방을 돌아볼 여유. 그 여유는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그것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지혜이고 진정한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야. 나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쉽지는 않지만, 외면하고 회피하느라 '제자리만 맴돌고 있을 나'를 생각하면 그건 더더욱 싫어져. 효영이는 그 여정을 이제 시작했으니, 조만간 더 멋진 사람으로 거듭나 있을 머지않은 앞날이 기대가 돼. 뭐, 지금도 멋지지만.
그리고 유경은 신기하게도 효영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고 나니 다시 그동안 써왔던 글이 읽혔다. 밤이 늦었지만 조금 더 수정을 하고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마음이 후련했다.
나를 거절한 나에게
중학생 시절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고입 시험을 마친 겨울방학, 그 친구와 꽤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 친구가 다니는 학원에 등록해서 같이 다녔고, 당시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빵집(가게 이름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에서 함께 빵 포장도 했다. 우린 이미 같은 고등학교 진학이 결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입학과 동시에 같은 반까지 배정받았기에 나는 우리의 우정이 지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짝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친구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대하는 친구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졌음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친구가 나를 피하려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을 혼자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차갑게 대하면서도 다른 친구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이야기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끝없는 외로움의 구덩이 속에 빠져들어 괴로워하곤 했다.
‘내가 왜 싫어진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답도 없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나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그런 내 마음을 모를 리 없었던 친구가 어느 날 내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요지는 이러했다.
“너에게 차갑게 대해서 미안해. 나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네가 부담스러웠어.”
나는 가끔 이런 착각을 한다. 내가 진심이면 상대방도 그럴 거라고. 내 마음이 100이면 그 사람도 100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 내 진심이 닿게 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아낌없이 다 주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믿었던 그 대상이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생각이 들면 배신감에 상처를 입는다. 일순간에 변해 버린 그 사람을 난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변한 걸까? 아니다. 그 사람은 변한 게 없다. 다만 그 사람도 나와 같을 거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 같았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싶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주위의 칭찬과 착해야 한다는 나의 믿음이 하나의 견고한 틀이 되어 나를 가두었던 것이다. 그 틀에서 나오지 못한 이유, 아니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거절당하기 두려워서,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기 싫어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기 일쑤였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나를 더 가혹하게 채찍질했다. 그렇다. 나의 깊은 내면의 진실을 거절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타인에게서 느꼈던 배신감의 근거 또한 결국 내가 만든 ‘바보 같은’ 기대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참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내게는 생각만큼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여전히 관성에 끌리듯 나보다 타인의 시선에 집중하게 된다. 나에게 ‘Yes’를 기대하는 상대 앞에서 ‘No’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내 안에 거절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기대하는 답에 부응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 그 안에 나를 끼워 맞춘다. 내 안에 있는 진실된 답, 즉 나의 목소리를 애써 잠재워버린다.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기 싫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궁극적으로 나는 나 자신을 수용할 기회를 또 한 번 놓쳐 버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내 것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결국에는 그 비난의 화살을 타인과 나 자신에게 돌려 버리는 바보처럼 말이다.
지금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다. 아무 일 없는 듯 덮어버리고 지나쳤던 내 마음이 안전한지를 돌아봐 주고 헤아려 줄 때다. 오랜 시간 내가 애써 잠재운 내 안의 나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찬찬히 들어볼 시간표가 왔다. 정면승부할 때다.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침대를 향하려는데 메시지가 하나 왔다. 효영이 올린 댓글이었다. 효영도 아직 안 자고 있었던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다 보면 문제는 터지고 네 마음이 내 맘 같진 않았음을 그제야 알게 되는 것 같아. 속마음을 털어낼 만큼 긴밀한 관계에서는 특히 자주 그런 착각을 반복하곤 하지.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무의식의 과정일 테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여지'를 생각하는 일은 스스로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이는 상대를 의심하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상대의 생각을 나 스스로 판단하지 말자는 말에 가까워. 너도 나와 같을 거라는 믿음은 어쩌면 나의 이기적인 판단일지도 모르니까. 그 판단이 괜한 기대를 만들어내고, 기대가 곧 실망으로 바뀌는 이 기전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도 나도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유경은 효영의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침대를 향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또 메시지가 왔다. 확인해 보니 동수가 댓글을 단 것이었다. 효영의 글에 단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자기 객관화의 여정에 접어들어 건강한 눈으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축하해. 효영이는 드디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으며, 나를 지키고 타자를 지키며 세상과 공감으로 소통하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작가의 길 위에 서게 된 것 같아. 이제 인생의 후반전을 막 시작한 시기이니 축복이라 말해도 되겠지? 앞으로도 정진하고 계속해서 공부하는, 즉 관찰, 성찰, 통찰하는 일상을 살아내시길 기원해. 이렇게 삼찰을 행하는 자만이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거든.
그리고 연이어 유경이 쓴 글에 대한 댓글도 달렸다.
유경이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고 전달도 잘 되었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행위가 결코 타자를 경시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에 뒤늦게나마 도달한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 하마터면 건강하지 못하고 기묘한 합리화로 우물 안에 갇힐 뻔한 것처럼 보였거든. 중학생 시절 친구와의 예기치 못한 이별이 가져다준 아프지만 소중한 깨달음인 것 같아. 하지만 우물 탈출기는 인생 전체에 걸친 현재진행형이기에 언제나 안주하려는 욕망에 대하여 저항하며 늘 깨어 있길 기원해. 유경이 네 바람 대로 건강한 내면을 가진 사람으로 성숙해지길.
눈이 빠질 것 같은 피로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는데, 또 메시지가 달리는 것이었다. 동수가 같은 주제에 대해 쓴 글이었다. 유경은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읽으리라고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동수가 쓴 글은 효영도 확인하지 못했다. 유경과 효영은 글쓰기와 함께 새로 시작한 삶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아마 꿈속에서도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까. 유경과 효영이 그다음 날 아침 확인한 동수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현재를 향유하는 삶
아직 아이가 없었을 무렵, 몇 달간 아내와 떨어져 지내던 적이 있었다. 혼자 짐을 정리하던 어느 날, 아내의 낡은 신발과 해진 옷이 눈에 밟혔다. 울컥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코를 갖다 대고는 잠시 무너졌다.
기대했던 향기는 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은 나프탈렌 냄새만이 내 코를 마비시킬 뿐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나프탈렌의 탈취 효과는 우리가 사랑했던 기억마저도 모두 제거해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함께 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그 신발과 옷은 언젠가부터 아내의 것이 되었지만 정작 나는 그 신발과 옷이 닳아가는 시간들의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 몫을 다한 사람처럼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에 기계처럼 무뎌져갔던 것이다.
옷장에서 수개월 동안 냄새가 다 빠진 옷을 만지작거리며 어슴푸레 깨달았던 건 아마도 지금, 여기의 소중함이었을 것이다. 빛바래고 설렘마저 사라져 버린 투박한 일상, 때론 티격태격하고 감정이 상하기도 하는 그 지난한 현실 속에 함께 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사랑과 그것의 소중함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난 몰랐다. 그만큼 나는 미성숙하고 나만 아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늘 있던 자리에 아내가 없어지자 그 공백에서 나는 일상의 균열을 체감하고 그날 바보처럼 그렇게 무너졌던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나 지금, 여기, 바로 내 옆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단 그것을 알아채고 누릴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현재를 향유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알아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도약이며 초월이다. 현재에 갇힌 자는 현재를 향유할 수 없다. 현재를 향유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현재를 알아채는 것, 곧 현재를 초월하는 것이다. 현재를 초월하는 자만이 현재를 알아챌 수 있으며 향유할 수 있다. 현재에 갇힌 자는 세속적일 수밖에 없으며 시대의 조류에 순응하거나 휩쓸려갈 뿐이다. 눈을 뜨고 있으나 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 아내에게 어울릴 만한 예쁜 코트를 하나 선물했다. 이젠 아내가 그 옷을 입는 날을 고대한다. 다행히 나의 눈은 어느새 현재에, 일상에, 함께 하는 순간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연 바보 딱지를 뗄 수 있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