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9장. 세 번째 만남
4월이었다. 만발했던 벚꽃이 때 아닌 비바람으로 사흘 만에 다 떨어진 날이었다. 동수는 꽃잎으로 질퍽해진 공원을 걸으며 모든 것은 빛나지만 화려한 순간은 잠시라는 생각을 했다. 유경은 아름다웠던 지난날들이 사그라진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아쉬워했다. 효영은 마흔이 넘어 다시 혼자가 된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느꼈다.
동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너네가 쓴 글을 읽고 감동했어. 너네들과 같이 하며 내가 체험한 글쓰기의 힘도 공유하고 내가 체득한 글쓰기 팁 같은 것도 좀 알려주며 잘난척하고 싶었는데 보기 좋게 당한 기분이야. 역시 글은 진정성이 최고의 가치라는 평소의 내 신념이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어. 너네들도 곧 겪게 될지 모르지만,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면 어느 순간 기교를 부리게 되거든. 내용은 형편없으면서도 남들에게 잘 쓴 글로 보이고 싶어서 치장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게 돼.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 가졌던 순수한 마음은 금방 동이 나고 작가가 아니라 글 기술자로 전락하게 되어버려. 위험한 순간이지.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겪었는데, 웃긴 게 뭔지 알아?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게 되더라구. 내가 쓴 글에 내가 감동해서 흥분 속에 잠을 설치다가도 그다음 날이면 똑같은 글인데도 너무 형편없게 느껴져 좌절하곤 했어. 무한반복이었지. 지금 보면 진짜 경박할 정도로 깊이도 내용도 없이 그저 화려하게 보이려고만 애쓴 게 역력한 글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때 내가 깨달은 게 있었어.
그게 뭔데? 유경과 효영이 동시에 물었다. 동수의 눈이 반짝였다. 음... 그건 읽기의 부재였어. 쓰기는 출력이라고 볼 수 있잖아.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글자로 분출하는 거지. 입력이 없는 출력은 불가능하잖아. 첫 글쓰기는 이런 면에선 예외라고 볼 수 있어. 이미 내면에 쌓여 있던 생각들과 감정들을 덜어낼 땐 새로운 입력과정이 없어도 되기 때문이야. 이번에 너네들이 쓴 글처럼 솔직 담백한 내용만으로도 꽉 차게, 아니 차고도 넘치게 되지. 그런데 글을 계속 쓰다 보면 그 내면의 재료들이 점점 바닥이 나게 돼. 이때 필요한 게 새로운 입력이야. 즉 읽기지.
읽기라면 독서를 말하는 거야? 유경이 물었다. 응, 기본적으로는 독서 맞아. 책을 읽는 거지. 그런데 내가 일부러 독서라고 하지 않고 읽기라고 한 이유가 있어. 그게 또 뭔데? 효영이 조금 짜증 난다는 식으로 물었다. 동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읽기라는 행위의 대상은 비단 책만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관찰이라고 하면 좀 더 잘 전달이 되려나? 우린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도 읽고 자연도 읽지 않니? 한가한 오후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해 봐. 정말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 그게 바로 사람을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마찬가지야. 산책을 나가거나 효영이 네가 좋아하는 산에 오르거나 할 때 우린 사람보다는 자연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그것도 읽기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해. 이 모든 읽기들이 글쓰기의 재료가 될 수 있어. 모든 읽기는 곧 입력이 되는 거지. 이번에 너희들이 쓴 두 편의 글은 출력장치가 고장 난 채 내면에 쌓여있던 과거 여러 읽기들의 혼합이었을 거야. 최근 두 달 동안 글쓰기를 하게 되면서 고여있던 그 혼합물들이 마침내 텍스트로 출력되기 시작했던 거지.
유경과 효영은 동수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유경은 지난 8년간 글쓰기를 혼자 시도하면서 이미 동수와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난관을 헤쳐나갈지 몰라 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정신없는 생활도 크게 한 몫을 했다. 그때 동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읽기 다음으로 해석에 관한 거야.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떨어진 벚꽃으로 어지럽잖아. 우린 지금 우리의 두 눈으로 같은 현상을 보고 있지. 그러나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해. 그래서 해석의 다양성이 생기게 되는 거야. 글쓰기는 입력도 중요하지만 입력된 것들을 처리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지. 읽고 나서 따라오는 건 해석이라는 행위이거든. 글쓰기는 읽기로 입력한 재료들을 해석해서 텍스트로 형상화시키는 거라고도 말할 수 있겠어. 말이 좀 어렵진 않나 모르겠네… 아무튼 아무리 똑같은 관찰을 하더라도, 이를테면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사람을 관찰하고 같은 산을 올라도 그것들을 글로 써내면 저마다 다른 글이 나오게 돼. 너무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글쓰기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읽기와 해석. 이 두 가지 개념을 글쓰기를 막 시작하는 너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유경은 동수의 말을 듣고 지지부진한 자신의 글쓰기 여정에 전환점이 찾아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효영은 산에 오를 때마다 관찰한 것들을 글로 남기려는 시도를 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셋은 한참을 서로 말없이 걸었다. 낮엔 더웠는데 저녁이 되니 쌀쌀함이 느껴졌다. 마침 해가 저물고 거리는 박명에 잠기고 있었다. 셋은 각자 어떤 운명 같은 무언가를 느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기도 했고, 왜 이제야 이런 순간이 왔나 싶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해석이었지만, 유경과 효영과 동수는 글쓰기로 인해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삶에서 어떤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품게 되었다. 버스 정류소에 다다르자 동수가 말했다. 다음 달 만남까지 이 주제로 글을 써 보면 어떨까 해. '내가 가장 바보처럼 느껴질 때' 어떠니? 유경과 효영은 각자 다르지만 자신의 과거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라 동수의 제안에 거의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저번처럼 단톡방에 글 올려줘. 나도 올릴게. 잘 지내고 다음 달에 또 만나.
동수는 버스를 타고 떠났고 효영은 몰고 왔던 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유경은 집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버스를 타지 않고 걷기로 했다.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리였다. 유경은 가로등에 비친 벚꽃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꽃잎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얼마 남지 않은 나무가 이상하게도 쓸쓸하게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았던 어떤 생명력이 느껴졌다. 꽃잎이 비바람에 떨어졌을 뿐 나무가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어떤 계시처럼 다가왔다. 꽃은 내년에 다시 피우면 될 일이다. 살다 보면 역경을 마주할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끝은 아닌 것이다. 살아 있다면, 살아 있어 건강하게 성실히 현재를 누리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면, 즉 과정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면 결과는 나오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찾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글쓰기는 실로 유경에게 찾아온 선물 같은 복의 통로였던 것이다.
유경이 집에 도착했을 무렵 글쓰다짓다 단톡방에 동수가 올린 짧은 메시지가 떴다. 아까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게 있었는데, 날씨 때문인지 까먹은 게 있어서 메시지 남겨. 읽기랑 관련된 제안인데, 혹시 너네 나랑 같이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고 감상문 쓰고 나누는 것도 하지 않을래? 효영은 아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유경은 곧바로 댓글을 달았다. 좋아, 나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솔직히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헤세,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이 제안을 오늘 너네 만나자마자 하려고 했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나 몰라. 놓쳐 버렸지 뭐야. 이런 동수의 대답에 유경이 다시 물었다. 왜 하필 헤세야? 기다렸다는 듯 동수가 대답했다. 어, 헤세 작품들의 키워드가 자아의 발견, 성찰, 분열, 그리고 합일을 거치는 내면의 성장이거든. 글쓰기를 막 시작하며 진정한 내 모습을 찾으려는 초보 작가들에게는 아주 적격인 것 같아. 유경과 효영 둘이 쓴 글을 읽고 나니 헤세가 갑자기 떠오르더라구. 나는 7년 전에 선집을 한 번 다 읽었는데, 재독을 하고 싶던 차에 마침 잘 되었어. 효영이 이 글 읽고 찬성하면다음달까지 헤세의 여러 작품들을 내가 선정할 테니 함께 읽고 감상문도 써보자. 유경은 중학생 때 읽었던 헤세의 작품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좋아,라고 댓글을 남기고 있는데, 효영의 댓글이 먼저 떴다. 아임 인! 유경은 좋아,라는 댓글을 달고, 효영의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기대가 되었다. 비록 세 명밖에 되지 않지만, 읽기와 쓰기를 함께 하는 중년의 동창들이 있다는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유경은 인터넷 서점에서 바로 책을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