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2장. 끌리는 사람, 되고 싶지 않은 사람
유경은 며칠간 효영에게 생긴 일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하는 조언을 삼가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는 터라 그날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유경은 효영이 심리적으로 건강한 선택을 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결국 동수에게 약속한 글쓰기 주제에 이르렀다. 또 며칠간 숙제를 하듯 새벽에 일어나 글쓰기에 매달렸다. 늘 힘들다고 불평하면서도 거기에서만 얻을 수 있는 어떤 만족감과 해방감이 있어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글쓰기가 일상으로 스며들어버린 것이다. 유경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 마침 학교에서 학생들 시험 기간이라 바쁜 일정이 겹쳐 글을 빨리 끝낼 순 없었지만, 무언가 하나를 매일 조금씩 성실하게 완성해 나간다는 게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어서, 그러면서 나 자신을 찾고 돌아보고 마침내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했다. 다음은 유경이 다섯 번째 만남 이틀 전에 글쓰다짓다 단톡방에 올린 글이다.
내어주는 사람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중 한 분은 중학교 1학년 담임이다. 영어를 가르치셨고 언제나 카세트 오디오를 들고 다니셨다. 학생들에게 현지인 발음을 들려주시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은 교과서뿐만 아니라 시도 들려주셨는데, 때론 시집을 들고 와 직접 읽어주기도 하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그 시 낭송 테이프나 시집을 구해서 몇 번이나 읽고 들었다.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지금, 교과서 본문은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많은 시(詩)들은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나 나를 멈춰 세운다. 오늘처럼 말이다.
지금도 시를 좋아한다. 시가 품고 있는 깊고 따스한 시선이 삶을 좀 더 여유 있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믿음과 체험 때문이다. 오늘 길을 걷다가 아지랑이처럼 그 시절이 떠올랐다. 자연스레 내 기억은 중학교 1학년 영어 수업 시간을 재빠르게 더듬었다. 고요한 교실 한가운데 투박하게 들려오는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그 옆에 다소곳하게 서 계신 선생님. 울컥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내가 좋아했던 건 시가 아니라 선생님이었고 그분의 마음이었다는 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를 담담하게 읽어주시던 선생님의 진심 어린 눈빛과 나지막하고도 명료한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 열네 살 소녀였던 내가 시에 담긴 의미를 모두 이해했을 리 없겠지만, 선생님이 전해주고자 하셨던 관심과 애정은 '사랑'이라는 온기로 세월을 거스르며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할 도리만 다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굳이'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어떤 특별한 이익이 없음에도 '애써'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내 안에 빛나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빛으로 전달해 주려 하는 사람이다. 그는 마음이 시키는 일을 결코 못 본 체하며 지나치지 않는다.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타자를 살리는 것과 내가 사는 것은 결코 다른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타자를 향한 시선은 내 삶을 진실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준다.
그는 섣부른 조언이나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 그저 말없이 곁을 내어주고 귀를 기울여 준다. 쉽게 판단하거나 결론짓기보다, 이해와 헤아림으로 조용히 다가와 마음의 손을 잡아준다. 마음 한편에 따뜻한 공간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언제든 그 품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작은 존재임을 자각하면서도, 때로는, 어떤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인 것처럼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다.
모두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까만 밤하늘이 되기를 힘쓰는 사람. 마음에 별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누가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 나와의 약속을 지켜가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꿈꾸며 사는 사람. 그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으며, 함께 있어도 자유로움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햇살을 가져오는 사람은 그 햇빛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햇살을 내어주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에게 끌린다. 닮고 싶어진다. ‘어떻게 하면 저 큰 바위 얼굴처럼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진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던 소년 어니스트처럼 말이다. 그 이끌림을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갈 내일의 나를 기대한다.
유경의 글을 먼저 읽은 건 동수였다. 동수는 유경의 글에서 중학생 유경을 볼 수 있었다. 묘사 때문에 염려를 하던 유경이 이번 글에선 그럴듯하게 학창 시절을 표현해서 동수는 흐뭇했다. 그러면서도 글이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을 해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글이 아주 자연스럽게 읽혀. 유경의 진정 어린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라 생각해. 나도 꼭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 우리 모두가 그러면 좋겠구. 비록 가 닿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도입부에 적은 영어 선생님과 시 이야기가 이 글의 주제 '내어주는 사람'을 잘 뒷받침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 시도 좋지만 영어 선생님의 마음이 좋았다는 논리는 괜찮은데, 그분이 '굳이' 혹은 '애써' 시 낭송 테이프를 틀어주고 시를 읽어주신 것 같진 않거든.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너만의 해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 물론 네가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내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걸지도 모르지만, 쓰인 글만 봤을 땐 그 선생님은 그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영어를 가르치신 분 같거든. 다시 말해서, 그 선생님은 '내어주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는 있으나 실제 그런 사람으로 역할하시진 않았던 게 아닌가 싶어. 옛 기억을 아름답게 잘 묘사했지만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모델을 가져오시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 이를 다르게 말하면, 글이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 같다는 거야. 이런 부분을 고려해서 유경이 네가 네 글을 수정해 보는 것도 괜찮은 글쓰기 훈련이 될 거라 생각해. 잘 썼어.
동수 역시 같은 주제로 쓴 글을 올렸다.
여백의 사람
화려한 빛보다 잔잔한 빛을 좋아한다. 사람도 그렇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빛나는 사람보다 어두운 무대 아래 잔잔한 빛을 머금고 있는 사람이 좋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끌린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 자체가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인간성이랄까, 사람 됨됨이랄까, 혹은 순수함이랄까, 진정성이랄까 하는 구체적인 단어를 선정하는 것조차 결례가 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 참 예쁜 사람이야, 하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정이 되는 사람.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사람. 미풍처럼 살며시 생각나는 사람이 그렇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끌린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면 나는 종종 상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아쉽기 때문만도 아니다. 한 사람의 뒷모습에는 무언가 다른, 그 사람만의 고유한 모습이, 미처 숨기지 못한, 혹은 미처 드러내지 못한 모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뒷모습은 제2의 얼굴이다. 거울에 비치지 않는 얼굴, 그러나 많은 것을,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거울에 비친 앞모습은 스스로 꾸밀 수 있다. 뒷모습은 그 앞모습 때문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그 사람을 더 순수하게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뒷모습까지 도도한 사람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먼저 다시 만나자고 하진 않을 사람이다. 앞모습은 도도했지만 뒷모습은 외로워 보이는 사람도 있다.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다. 혼자 보내기가 괜히 미안해지는 사람이다. 마음에 남아 기도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앞모습은 약해 보여도 뒷모습은 씩씩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만나서 얘기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헤어질 때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은근히 놓이는 사람이 그렇다. 앞모습도 뒷모습도 모두 측은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무너져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꾸는 앞모습까지도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만날 때면 말은 줄고 마음은 바빠진다. 그럼에도 상대의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결국엔 내 마음도 무너진다.
뒷모습 속엔 그 사람의 여백이 있다. 그 사람은 미처 모를, 그래서 더욱 은밀한 진실이, 더 많은 진실이 담겨있다. 나는 그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여백의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깨끗한 여백, 깊고 풍성한 여백, 여백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 나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유경은 동수의 글을 읽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신의 뒷모습과 여백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수가 말했던 관찰, 성찰, 통찰로 구성되는 삼찰이 잘 드러난 글 같았다. 그리고 유경도 스스로 동수가 말하는 여백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글의 힘을 다시 한번 느꼈다. 다음은 유경이 남긴 댓글이다.
나의 앞모습과 뒷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생각해 보게 되었어. 부디 앞모습만 치장하기에 급급해서 뒷모습이 초라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게 돼.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며 마음이 쫓겨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지 않기를,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여백 하나를 만들어두고 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글로 남겨지는 나의 이 바람들이 삶의 구석구석에 아름다운 여백으로 존재하기를. 그리고 내 곁에도 그런 여백과 같은 사람이 벗으로 함께 하면 좋겠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글 공유해 주셔서 고마워.
그 시간 효영은 카톡 소리에 메시지를 확인했고 마침 다 쓴 글을 더 이상 퇴고하지 않고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은 이미 며칠 전에 완성했는데 계속 사소한 표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고 또 고치고 있었던 것이다. 유경과 동수가 올린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기 전 효영은 자신이 공들여 쓴 글을 올렸다.
물음표를 상실한 인간
비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학창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창가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열띤 얼굴과 칠판을 휘갈기는 분필을 번갈아 보며 수업내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궁금한 게 생겼지만 질문할까 말까 고민한다. 손을 번쩍 들면 보게 될 나를 향할 눈들을 나는 미리 두려워하고 있다. 그거 너 빼고는 다 알고 있는 거라고,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고, 집중을 못하니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나 하는 거라고, 눈들이 꼭 그렇게 말할 것만 같다. 모르고 넘어가는 게 차라리 맘이 편하다 생각한다. 이번에도 결국 그냥 모르고 넘어간다.
그 시절 나는 그런 아이였다. 궁금증 해결보다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했다. 어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도, "왜요?"라고 반문하지 않았다. 혹여나 반항으로 여겨질까 두려웠다. 그저 소심했을 뿐이었던 나는, 어느새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말만 잘 들으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니, 나름 행복했고, 말 잘 듣는 그런 내가 좋았다. 부모와 선생이 기뻐하는 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궤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아니 방탕하게 행동하는 이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을 보면서 말 잘 듣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우월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고개를 위아래로 밖에 흔들 줄 모르는, 물음표를 상실한 인간이 되어갔다.
물음표를 잃어버린 나에게는 그만큼의 빈틈이 생겨갔다. 질문과 의심을 통해 메꿔져야 했을 자리였다. 곳곳에 있는 빈틈들은 그 위에 무언가를 더 쌓아 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일순간 일그러지고 무너져 버렸다. 궤도의 경계 내로만 삶의 범위가 좁혀졌던 나는, 빈틈을 인식하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답답함도 함께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내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일까.
과연 이게 맞는가 하는 의심이 내 안에서 일기 시작했다. 내가 영위하고 있는 일상과 그 삶을 이루고 있는 습관들에 대해, 즉 당연하다고 생각해 오던 것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의심은 질문을 만들었고, 질문은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평생을 머물던 낡은 궤도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다음은 자유롭게 날아오를 차례였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이,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경험을 한 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의심했고 물음표를 던졌으며, 낡은 궤도로부터 벗어났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그들은 분명 자유롭게 날아올라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얽매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연하지 못하고 굳어져 있다.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자신의 잣대를 다른 이에게 들이민다. 궤도를 벗어날 때 맛보았던 자유의 쾌감이 너무 달콤해, 꼼짝 않고 드러누운 것만 같았다. 얽매여 있다는 사실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비가 그쳤다. 지붕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웅덩이를 향해 떨어진다. 아, 동그란 물결이 인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작은 궤도에서 큰 궤도로 퍼져나가는 형태다. 중심에서 시작된 파문은 처음에는 자그마한 궤도를 형성한다. 다음에 만들어질 궤도는 새롭지만 이전 궤도로부터 만들어진다. 결국 가장 바깥쪽의 궤도는 중심을 포함한 안쪽의 모든 궤도들의 합작품이다.
그렇다, 궤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오를 것이라 여겼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하나의 궤도에서의 이탈은 또 하나의 궤도로의 안착이었다. 그 궤도가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든, 인간은 다시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궤도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전의 궤도를 품은 채로 더 큰 궤도를 만들며 성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물음표를 끊임없이 회복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과연 이게 맞는가'라는 질문은 지금의 나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계속되어야 할 질문인 것이다.
다시 한번 결심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번쩍 손들고 질문하자고. 인생 다 산 것처럼 드러눕지 말자고. 웅덩이에 일었던 물결처럼 멀리멀리 퍼져나가자고. 내 인생의 끝, 가장 바깥쪽의 궤도는 어떠할지 한번 가보자고.
유경과 동수는 효영의 글을 읽고 마음이 놓였다. 주연에게서 온 메시지 때문에 효영이 심리적으로 붕괴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효영은 생각보다 내면이 강한 것 같았다. 유경과 동수는 바로 댓글을 달았다.
위아래로밖에 고개를 흔들 줄 몰랐던 순응적인 아이는 ‘착한 아이’로 이름 붙여지고, 점점 그 틀에 나를 맞추어 사는 게 익숙해지고 쉬워지는 것 같아.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어. 효영이는 의외로 나랑 정말 비슷한 게 많은 것 같아. 오래도록 굳어진 궤도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효영이 너의 마음이, 요즘 쓰고 있는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아. 특히 그 벗어남은 이전의 내 모습을 제거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까지도 품고 가는 것이라는 너의 해석에 공감이 돼. 멀리 원을 그리며 자유롭게 퍼져나갈 너만의 멋진 인생 궤도를 기대할게.
권위자의 시선에 맞추기 위한 순응적인 삶에는 주체가 없지. 주체가 없으니 모든 건 수동적이 되어버리고 말이야. 자발적 순종은 주체가 전제가 돼. 그리고 주체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교만과 겸손의 양극을 오가는 숱한 경험이 전제가 되고. 이것이 우리가 자칫 방황이라고도 표현하는 사춘기 혹은 청소년 시기의 이유 없는 반항과도 겹치지. 그런 '방황'을 겪어야만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하며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것 같아. 즉 방황은 방황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거지. 크게 잘못된 길이 아니라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직접 체험해 보는 게 주체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방법이라 생각해. 글이 무척 공감이 되고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어. "이런"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서 더욱 그런 것 같아. 앞으로도 글쓰기 연습하면서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더 잘 알아가는 열매가 맺히면 좋겠어.
동수는 이어서 자기가 쓴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에 대해 쓴 글을 올렸다.
나는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끝을 예감할 때마다 마음이 착잡해졌던 이유는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또 해버렸다는 사실로 인한 자책감이었다. 나는 나의 불완전함을 나의 부족함이라 여겼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찰과 반성의 일환이라 믿었다. 자기애와 자기 연민의 어정쩡한 경계에 서서 뚝심 있게 버티는 게 성장하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화살을 남이 아닌 나에게 돌리는 행위는 묘한 쾌감을 선사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동시에 대단한 사람도 될 수 있었다. 이 방법은 꽤 유용했다. 나의 불완전함을 탓하기만 하면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정작 누가 그랬냐며 화를 내던 사람들도 내가 먼저 나서서 나의 불완전함을 탓하면 금세 잠잠해졌다. 나로서는 겸손의 왕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고, 나는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며, 화합의 통로 그 자체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남 탓이 아닌 자기 탓을 하면 모든 다툼도 사라질 거라는 믿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오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 오류에서 해방되던 순간은 내겐 일종의 구원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나의 비겁함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나의 불완전함이 나의 부족함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불완전함을 탓하고 희생양 삼아 마치 잘만 하면 완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 과거를 단순화시켜 버리는 비겁함이야말로 나의 고질적인 부족함이었다는 것을.
불완전함을 탓하는 행위가 비겁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행위가 사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다고 말만 했을 뿐, 어디가 불완전한지, 왜 그랬는지, 어떻게 하면 다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숙고는 정작 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비겁하다 말한다. 비겁함은 삶에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언제나 해답처럼 나타나 깊은 성찰을 가로막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탓하는 행위는 자신을 돌이켜 볼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쉽고 간편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비난하고 원망할 대상을 찾아 희생양 삼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희생양 삼는 행위는 언제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목적을 전제로 할 뿐 그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희생양이 아닌 희생양 삼은 자들에게 있는 법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기만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고백하는 행위 자체의 파괴력 뒤에 숨어 뭇사람들로부터 오는 존경 어린 눈초리를 은밀히 즐기고, 그것에 기반하여 스스로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믿게 되는 상황 전개는 중독성이 강하다. 적당한 연기력만 갖추면 탁월한 사기꾼이 될 수 있다. 타자도 속이지만 자기 자신도 속이고 마는 비극적인 사기꾼 말이다.
우린 모두 불완전하다. 그래서 인간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행위는 나는 인간이다,라는 말과 다름없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겸손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겸손의 출발은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더 이상 나는 완전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불완전하지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질문을 바꾼다. ‘나는 얼마나 완전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얼마나 사랑하지 못했는가’로. 이 질문 앞에서도 여전히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더 이상 비겁해지지 않는 것,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믿는다.
효영은 동수의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논리의 흐름이 잘 읽히는 글 같아. 다른 말로 하자면, 글쓴이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독자가 글에서 읽어내는 바가 일치하는 글로 보여. 너의 글은 명료하고 시원한 느낌을 줘. 반면에 내가 쓴 글은 뭔가 답답한 느낌이구.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막막하지만, 동수 너의 말대로 계속 써나가다 보면 어느새 성장해 있으리라 믿고 용기 내어 가보려고 해. 불완전함을 탓하는 비겁한 사람은 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네 글을 읽고 지금 내 상황이 내가 선택한 이 길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절대 될 수 없다고도 느꼈어. 불완전함을 탓하는 행위가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하는 장애물이 된다는 말에 공감이 많이 됐어. 불완전함을 탓하는 게, 겸손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게 편하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쩌면 게으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게으름을 겸손이라고 스스로 속이는 자기기만적인 인간의 내면도 들여다볼 수 있었어. 그게 내 안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 주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이런 글은 잠들어있는 나를 깨워주는 것 같아. 나도 잠들어있는 누군가를 깨워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
동수는 효영의 댓글을 읽고 안심이 되었다. 먼저는 효영이 개인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아서, 그다음으로는 자기 내면의 성찰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때 유경도 동수의 글에 대한 댓글을 남겼다.
'겸손'이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나를 더 높이려 하고, 나는 좀 괜찮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만들려 한 적은 없는지 네 글을 읽고 나 자신을 돌아봤어. 진정한 겸손은 나를 제대로 보는 데서부터 시작됨을 깨닫게 돼. 내 안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살필 줄 알고, 진실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 나 자신을 비겁하게 덮어두거나 기만하지 않고 대면할 줄 아는 것.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거치지 않은 ‘겸손’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그저 ‘내 잘못이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라는 비겁한 태도로 '겸손'을 이용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돼. 먼저 나에게 진실한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글 써줘서 고마워.
동수는 마음이 흡족했다. 글쓰기라는 행위가 유경과 효영에게도 긍정적인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아서,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위로와 치유, 성장과 성숙, 성찰과 통찰을 두 사람이 각자의 스타일로 조금씩 얻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모처럼 살아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깊은 기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