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3장. 유경의 일상
다섯 번째 만남은 6월 첫째 주 목요일 저녁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동수가 미국 출장을 가야 하는 바람에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그다음 주로 미루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유경이 학교에서 회식이 있다고 했다. 몇 가지 안이 더 오고 갔으나 결국 3주나 미뤄야 했다. 모임 간격이 거의 두 달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동수는 이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곧바로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우리 모임이 각자의 사정으로 미뤄졌지만 글쓰기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더 생겼으니 글 하나씩 더 써보기로 하는 게 어떨까? 주제는 각자 알아서 정해서 말이야.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적어도 좋고, 마음속에 생각나는 어떤 상념들을 일정한 논리를 갖춰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유경이 메시지를 확인하고 바로 댓글을 달았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 동수다워. ㅋㅋㅋ 동수는 그 말을 칭찬으로 들었다. 좋아. 유경이는 오케이인 거지? 좋아. 그렇잖아도 일기 비슷한 걸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거든. 묘사 위주로 글을 좀 더 잘 써보고 싶어. 이번 기회를 통로로 삼아 보려구. 멋지다. 유경!
효영은 하루가 지나도록 답이 없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은 듯했다. 유경과 동수는 걱정이 되었다. 사흘이나 지나고 나서야 효영이 댓글을 달았다. 미안해. 답글이 늦었지? 2박 3일로 부산에 다녀왔어. 원래는 당일치기로 낯선 곳에 여행이나 가자고 나섰는데, 거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휴가까지 내고 푹 쉬다 왔어. 부산 출신인 동수가 부산 어디? 라며 댓글을 달았다. 음, 태종대 옆에 있는 흰여울마을이야. 효영이 답하자 동수는 거긴 나도 한 번도 안 가본 곳인데. 좋았니?라고 물었다. 어, 거기서 본 일몰이 황홀했어. 이틀 내내 해 질 녘 바닷가에 앉아 몇 시간을 멍 때렸는지 몰라. 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걷기도 많이 걸었어. 일부러 인터넷은 사용하지 않았어. 혹시나 또 메시지가 올까 봐 두려웠거든. 유경과 동수는 효영이 두려워하는 메시지의 발신인이 주연임을 눈치채고 한동안 말을 아꼈다. 아직 효영은 주연에게 답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번 글쓰기로 인해 생각이 정리된 줄 알았는데 그렇게 쉽게 정리되기에는 주연이 효영의 인생에 남긴 흔적이 너무나도 깊었던 것이다. 효영이 다시 댓글을 달았다. 글쓰기가 좋고 정말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 같아서 힘이 많이 돼. 그런데 이번에 부산 가서 느낀 건데,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멀리 하고 좀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아보니 이게 지금 내겐 약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이것도 오래 지속할 수 없겠지. 그래서 나는 한 달 쉬고 다음 달에 다시 조인할게. 동수는 미국 잘 다녀오고, 6월 마지막주 목요일 저녁에 그 카페에서 보자.
유경은 조금은 머쓱해진 상태로 그럼 잘 쉬다 와, 효영아,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효영의 글에 하트표를 눌렀다. 효영이 진심으로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으로 돌아오길 기도했다. 동수 역시 효영에게 잘 다녀오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고, 유경에게는 글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유경은 동수의 집요함이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그 열정을 유경도 갖고 싶었다.
유경은 그날부터 다시 새벽마다 일어나 글쓰기에 매달렸다. 동수가 말한 일상의 단편을 묘사 위주로 써 보려고 애썼다. 열흘 정도 노력한 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공존
귤 한 상자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단단히 붙어 있는 테이프를 뜯어내자 오돌토돌 탱탱한 귤들이 상자 가득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어디에 보관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귤 상자를 번쩍 들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커다란 창을 여는 순간, 찬 바람에 코 끝이 시렸다. 이 정도의 온도라면 냉장고 못지않게 귤의 신선도를 유지해 줄 수 있겠다 싶었다. 얼른 상자만 내려놓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실내로 들어와 베란다 창을 닫으려는 순간,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봄부터 베란다에서 키워온 다육이 화분 두 개였다.
집에 있는 화분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학교에서 키우다 가져왔거나 학원에서 선물로 받아온 것들인데, 집에 들어온 이상 모든 식물 관리는 엄마인 내 몫이 되어버리곤 한다. 딱히 식물에 대한 애정도 없지만 내게 맡겨진 생명체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키우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리고 부끄럽게도, 여태껏 1년 넘게 키워본 적이 없다. 언제나 겨울이 문제였다. 추위 때문에 베란다 출입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그것들은 관심 밖으로 점점 밀려났던 것이다. 다육이에 대한 나의 애정도 추위를 이기진 못했던 걸까.
맨 처음 아이들이 화분을 가져왔을 때 다육이는 아기 손바닥 만한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것들에 물을 뿌려주기도 하고 창을 열어 햇살을 비춰주기도 했다. 조금씩 자라 가는 다육이를 바라보며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생각나 흐뭇했다. 어느 날 문득 다육이가 심긴 작은 화분이 비좁아 보였다. 여유 공간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더 큰 화분을 찾아 흙을 채워 넣었다. 중앙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자리를 만들고, 다육이를 조심스레 옮겨 준 뒤 흙을 토닥이며 더 편안히 뿌리내리길 바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줍은 듯 작은 새순이 돋아나고 싱그러운 초록빛을 반짝이며 뻗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작은 행복을 느꼈다. 무더운 여름날엔 뜨거운 햇살에 지칠까 봐 호스로 샤워를 시켜주기도 하고, 말끔히 씻긴 그 모습이 예뻐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성큼 다가왔고 추위에 약한 나는 실내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자연스레 베란다로 나가 화분을 확인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나중엔 그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귤 한 상자 때문에 오랜만에 나간 베란다에서 다육이가 눈에 밟혔던 날 나는 몸을 돌려 화분 두 개를 하나씩 집안으로 들였다. 하나는 거실 구석에 놓인 작은 협탁 위에, 다른 하나는 주방 개수대를 마주하고 있는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잎에 쌓인 먼지를 닦아주고 물도 살짝 뿌려 주었다. 아직 연둣빛을 내는 새순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대견해서 검지 끝으로 살며시 매만져 주었다. 웃는 것 같았다.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미안함에 콧등이 시큰했다. 내가 잊었던 건 화분 두 개가 아니라 작은 두 생명이었던 것이다. 생명에 대한 내 마음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다가와 부끄러웠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생명의 무게를 함부로 가늠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주방의 작은 창을 마주하고 설 때마다 다육이를 만난다. 볼수록 정겹다. 내 눈에 담기는 생명의 몸짓이 신비롭고 사랑스럽다. 존재 자체로부터 느껴지는 생명력이다. 그 '살아있음'에 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생명을 마주한다. 물 한 모금 적셔 주며 안부를 묻는다. 밤새 잘 있었느냐고.
유경의 글을 읽고 동수는 적잖이 놀랐다. 유경이 묘사한 일상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묘사에 약하다고 하더니만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묘사가 담긴 글이었다. 그래서 감동이 된 채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한 편의 잘 써진 에세이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야. 귤 한 상자에서 다육이로, 다육이에서 유경이 너의 일상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이동이 자연스러워서 좋았어. 식물에 대한 애정, 그것을 잘 보듬지 못한 자신의 한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죄책감까지 너의 내면도 잘 느껴져서 더 좋았어. 반복되는 문장도 이번엔 보이지 않았고, 맴도는 느낌도 없었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읽히는 글을 잘 썼어. 여기서 조금 더 전문적인 글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통찰이 묻어나면 좋은데, 지금 유경이 가진 총알로 이 정도 쓸 줄 안다는 건 정말 잘하신 거라 생각해. 내가 읽은 유경이 글 중 이번 글이 최고야. 이 정도면 독자들의 공감을 충분히 유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러나 공감에서 한 단계 나아가야 책으로 만들어질 에세이가 될 수 있어요. 그건 앞서 얘기한 통찰이야. 독자들로부터 공감에서 멈추지 않고 어떤 깨달음까지 가도록 만들어야 프로 작가의 에세이가 되는 것 같거든.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나의 주관적인 견해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받아들이시면 돼. 물론 이 부분은 시간이 걸려. 인문학과 철학 혹은 신학까지 어렵더라도 깊게 공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유경이는 충분히 좋은 에세이스트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 믿어. 정말 잘 썼어.
유경은 동수의 칭찬을 듣고 날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인정받으려고 쓴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글쓰기라는 영역에서 먼저 걸어간 동수의 인정은 유경에겐 하나의 동력이 되었다. 글쓰다짓다에서 함께 써나가는 글 말고도 일상의 여러 단편들을 더 많이 써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놓치고 지나가버린 많은 소중한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가능한 많이 글로 담아내리라 다짐했다. 유경은 드디어 작가의 여정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