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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by 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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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아침마다 차를 타고 정뭄을 통과했지만 몰랐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정문 쪽으로 뒤를 돌아보니 그제야 보였다. 내가 지나온 길 양 옆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완연한 가을이 이미 내 일상을 깊숙히 침투한 것이다.


지난주 토요일 속리산 법주사 근처를 두 시간 정도 영천에서 올라오신 부모님과 거닐며 이제 막 진입한 가을을 즐겼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올해도 잠시 왔다가 알아채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가을을 느끼지 못할 뻔했다.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좋은 곳을 다니는 횟수가 줄어들기 마련인가 보다. 어떻게든 가족과 다시 합치기를 바라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묘연하기만 하다. 나이 오십이 다 되었는데 당장 코앞에 놓인 미래도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나는 붉게 물든 나무를 보며 잠시 서글퍼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역사를 공부하면 깨닫게 되는 유일한 사실 한 가지가 인간은 역사를 공부해도 절대로 공부한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신기하게도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어떻게든 살아남게 되는 존재라고 했던가. 많은 부분 공감이 된다. 내가 알기로도 인간은 그리 현명하지 않다. 과거를 통해 배울 수는 있으나 현재를, 나아가 미래도 그렇게 살지 않고 결국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고 근시안적인 목표를 향해 달음박질하다가 넘어지는 존재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서조차 한 가지 희망을 본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사실 말이다. 내 과거를 돌아봐도 계획대로 된 적은 거의 없지만 어떻게든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때 그때 예상치 못한 만남과 시간표가 주어졌고 내 인생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급선회하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했으며 우물쭈물하던 것을 과감히 내려놓기도 했다. 이해할 수는 없고 예측할 수도 없으며 또 바라고 있을 수만도 없지만, 이런 경험을 직접 해본 결과 나는 어떻게든 또 내게 남아 있는 나날을 살아남게 되리라고 믿게 된다. 사는 건 계획이 아닌 믿음이라는 것. 이 명징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나는 또 겸허해진다.


어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완독하고 한동안 먹먹한 감정에 몸도 마음도 다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이 저녁이라는 메시지가 잠자던 나를 깨우는 듯했다. 가장 좋은 시간은 내게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맞추려는 불필요한 의지를 내려놓고 담백하게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다 보면 또 다시 내겐 예상치 못한 만남과 시간표가 주어지리라 믿는다. 인생은 내가 개척해 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엔 인도 받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잘 인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면 될 일이다. 정의롭고 바르고 성실하게 이웃을 돌아보고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면서 살아가면 될 일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윈 내 믿음이 부족해서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행히 다다르게 된다.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모두들 잘 살아내시길. 일상,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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