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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엄마선생님 Dec 15. 2024

나는 오늘도 눈물을 비워낸다.

소피의 분노가 알려준 '감정 다루기'

"뚝! 어디서 울고 있어!"
한겨울 서릿발같이 매서운 질책. 어릴 적엔 울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으아앙!!" 귓가를 때리는 울음소리.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둘째. 내가 돌아보자 불현듯 더 서러워졌는지, 울음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온 집에 울렸다. 내 골도 잠시 울린 것 같다.


  달그락달그락, 아침 먹은 그릇부터 얼른 정리해 두고 큰 애는 등교, 작은 애는 등원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둘을 잠시 방치했다. 이제 둘 다 말귀는 알아먹으니, "엄마 좀 바빠, 알지?" 이 한마디면 눈치껏 알아서 나란히 앉아 오순도순 책이라도 읽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인가, 나란 엄마?


"무슨 일이야?"

"언니..가.. 히끅..히끅..!"


  끅끅대는 통에 온 촉각을 곤두세웠는데도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뚜나(둘째의 별명)야, 엄마가 무슨 말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어. 더 울어도 되니까 들어가서 다 울고 나올래?"


  서러운 발걸음이 툴툴대며 침대로 향한다. 닫힌 문 넘어 훌쩍훌쩍 콧물까지 섞어 우는 소리만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언니가 학교로 출발하고서도 한동안 방에서 끅끅 대던 녀석은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선 쭈뼛쭈뼛 내 곁으로 와 내 다리 한쪽을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 안았다.


"다 울었어? 지금 기분은 어때?"

"괜찮아. 울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헤헤."

"뚜나야, 우리 어제 읽은 책 기억나? 소피도 언니 때문에 화가 많이 났었잖아."

"응! 기억나!"

"우리 그 책 한 번 더 같이 읽을까?"


[When Sophie gets angry, really really angry]

  표지부터 강렬하다. 파란 눈의 금발머리 소녀가 코를 벌름벌름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빨간 바탕에 두고 보니 일그러진 얼굴이 더욱 도드라진다.


"콧구멍 좀 봐. 큭큭. 화난 거야?"

"왜 화를 내고 있지? 웃어봐 봐!"


  저녁을 먹고 난 후, 소파 위에 올려둔 책을 집어 들고 둘이서 재잘재잘 표지 속 소피에게 말을 걸고 있다. 소피의 분노는 어디서 온 것인지 책장을 넘겨볼까?

  즐겁게 인형놀이를 하고 있던 소피. 언니(사실 동생일지도)가 와서 소피의 인형을 가져가 버린다. 둘은 인형을 사이에 두고 다툼이 일어나고, 엄마마저 언니의 편을 들어준다. 넘어진 소피의 편은 정말 없는 건가? 화가 난 소피. 정말 정말 화가 나버린 소피는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새빨간 불길을 뿜어낸다. 언제 터져버릴지 모를 용암처럼 분노에 찬 소피는 밖으로 나가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조금 울었다. 걷다 보니 화는 차츰 가시고 슬슬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 소피. 오래된 나무를 발견하고 그 위에 오른다. 살랑이는 바람이 머릿결을 스치고, 파도치는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드넓은 자연이 소피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평온한 마음을 되찾고 돌아온 소피를 가족들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반갑게 맞이한다.

  강렬한 소피의 감정만큼 그림들도 강렬하다. 시뻘건 불을 내뿜으며 포효하고,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정말 곧 터지기라도 할 듯 부풀어 올랐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불꽃같은 격분을 이렇게 생생한 색감으로 표현하다니. 눈으로 보는데도 열기가 느껴지는 듯 뜨겁다. 평온한 소피의 마음은 또 어떤가? 파란 바다처럼 잔잔하고, 푸른 하늘처럼 청명하다. 고목은 포근한 새둥지처럼 다정히 소피를 안아준다.

  감정의 변화가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되니 소피의 화를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아이들도 그런 것 같다. 소피의 언니(첫째는 '아니야. 동생이야. 저렇게 언니 인형을 함부로 뺏는 건 분명히 동생일 거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항상 뺏기는 입장의 동생이었던 나도 은근슬쩍 소피를 동생으로 만들어 버렸다.)가 나빴는데, 왜 엄마는 언니 편만 들어주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나에게 따지고 든다. 워워, 얘들아, 엄마가 그런 거 아닌데. 그래도 소피가 참 착한 것 같단다. 언니한테 직접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화를 삭이고 돌아와서 웃으며 다시 노는 걸 보니, 꼭 저들을 보는 거 같다나? 그래, 사실 그래서 엄마가 이 책 빌려온 거야. 잡아먹을 듯이 싸우고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깔깔거리며 웃는 너희가 이 책에 들어있더라고.


  슬픔, 분노, 기쁨, 혐오, 환희, 두려움, 놀람 등등 하루라도 '감정'을 겪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없다. 감정은 단순히 떠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표출하고, 어떻게 다루는 가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저명한 교수가 굳이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겪은 일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소피는 우리에게 건강하게 감정을 표출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뚝! 어디서 울고 있어!"


  한겨울 서릿발같이 매서운 질책. 어릴 적엔 울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눈물을 꾹꾹 눌러 참아 목도, 눈도 시큰시큰 아파왔다. 이제사 글을 쓰며 이런저런 감정들을 조금씩 풀어내는 모습에 마음 한쪽이 찌릿하기도 하고, 억눌러 감정들이 봇물 터진 콸콸 흘러나오는 것에 해방감이 들기도 한다. 감정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나라는 존재는 한결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딸들이 울면 굳이 울음을 막아서지 않는다. 방에 들어가 혼자만의 공간에서 온갖 감정을 다 토해내고 돌아오면, 슬펐던 것도 화가 났던 것도 다 없던 일인 것처럼 생글거리는 미소가 돌아온다. 비가 그친 후 청명해진 하늘처럼 울음을 쏟아낸 마음은 전에 없이 깨끗해진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뚜렷이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최신식 내비게이션을 장착하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더 이상 길을 잃지 않고 나를 이해하고, 나아가서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된다.

  자기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그 감정이 이끄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북극성이 있다. 감정을 인정하고, 떨쳐내고, 때로는 보듬고 가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보다 잘 조절하고 다룰 줄 알며 인생의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림책을 덮고 다시 단장을 하고, 평온해진 소피처럼 우리는 웃으며 집을 나섰다.


"뚜나는 화가 나면 우는 거 말고 어떻게 화를 푸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나는 화가 나는 일을 종이에 적고, 그걸 쫙쫙 찢어서 쓰레기통에 탁 넣으면 화도 같이 쓰레기통으로 가버리는 거 같아."  

"와! 그거 정말 멋진 방법이다! 혹시 다음에 또 화가 나면 우리 같이 종이에 적어서 시원하게 찢어버릴까?"


  화? 그거 털어내고 나면 그냥 옷에 달라붙은 먼지조각 같은 걸지도.   

  청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하늘이 유난히도 맑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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