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um Feb 13. 2021

베를린이지만

난 입시생이다

2008년 3월 난 제2의 세상이 얼떨떨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기초 독일어를 3달을 배우고 왔지만 어학원에서 다시 A1부터 듣기로 했다. A2부터 들으면 귀가 안 뚫려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꼼꼼히 알아본 후 나한테 맞는 학원과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여 어학원 비가 조금 저렴한 곳을 다니면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할 수 있는 루틴을 만끽하려 한다. 수업이 진행되고 A1부터 다니기 시작하는데 마냥 좋았다. 한국에서 어느 정도의 기초를 배워와서인가 수업이 재미가 난다. 베를린을 아직은 즐기지 않기로 한다.


내가 사는 집인 Alt Tempelhof에 공동이 쓰는 집인 WG를 구해 들어갔다. 욕실과 주방을 같이 쓰는 독일에서는 문화로 자리 잡은 형태이다. 독일에 와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낯설지만 기대되는 문화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사는 집계약과 Deusche Bank 계좌개설, 관공서 어학비자 받는것은 지인의 도움을 받았다. 방문도 잠그지 않고 공동생활을 하는 그런 문화에 사는 독일 사람들이 궁금하다. 전부 독일인들이 사는 집인데 내가 부딪힐 때마다 독일어를 써야 하니 불편하지만 나의 귀와 입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감사해하고 만족하기로 했다.


독일은 관공서나 은행에서나 어디든 일처리가 너무 느리다. 처음엔 답답하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적응하기로 한 후 조바심보다 느긋해졌다. 관공서 서류하나 받는데 2-4주가 걸리고 인터넷 설치하는데 예약하고 2-3주를 기다리는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했다. 한국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역시 독일은 느리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건 여유가 있다.




어느 날 베를린 (구)동독지역에 사시는 목사님 댁에 초대를 받고 저녁식사와 담소를 나누고 오는 길 U-Bahn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무리들을 만났다. 얼굴 곳곳에 뚫어놓은 피어싱을 한 사람이 음산함 기운과 함께 가까이 올 때 쳐다보려 했는데 옆에 동행인이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난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하라는 데로 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조금 지나고 갑자기 누구와 부딪혀 넘어질 뻔했다. 휘청거리고는 추스르고 얼른 갈아탈 U-Bahn에 타고나서 옆에 있던 지인이 알려줬다.

„저런 사람들은 나치예요. 조심해야 해요. “

독일은 나치 단체가 있다. 사회에 불만을 품고 외국인을 상대로 잘못된 줄도 모르고 힘으로 약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인데 무리 지어 다니니 밤늦게 다니면 안된다고 일러줬다. 실제로 아시아 남자의 피해를 알려주면서 (구)서독에 살아야 한다는 제안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아끼고자 학원 마치면 마음 맞는 아는 동생과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하기로 한다. 학원에서 배우는 책 하나를 무작정 고르고 그 책으로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익히기로 하는데 단어시험 위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나의 집에서 만나서 공부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의 시험을 위해 난 열심히 준비했다. 공부는 규칙적인 반복이 답이라 같은 시험을 2주 후 다시 시험을 쳐서 몇 번을 다시 쳐서 완전하게 내 것이 될 때까지. 시험의 압박이 토가 나올 정도의 강도였기에 가끔씩은 우리들은 서로에게 유희의 시간을 주고자 게임과 한국 예능을 보며 유희를 즐겼다.




공부는 날로 향상되어서 베를린 대학 한국어과 재학 중인 언어 파트너를 소개받아 일주일에 한 번 3-4시간씩 대화를 하며 언어교환 시간을 하기로 했다. 서로에게 모국어 교정을 해주면서 그렇게 그 친구와 난 서로의 집에서 약간의 먹을거리와 함께 대화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그렇게 때가 되면 파티도 같이 가고 베를린 구경도 같이 하는 소소한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회화에 자신이 붙기 시작했다는 게 뿌듯하기만 하다.


난 독일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눈치 볼 상사도 없고 노처녀라 결혼 안 한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돈 벌어야 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 지금이 난 너무 소중하지만 긴장도 하였다. 결과가 안 좋으면 난 다시 한국을 가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온전히 나로 사는 그런 내안의 날 만나는건 하루하루가 설렌다.




미대를 가야 하기 때문에 마패(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했다. 한국에서 공부한 디자인 쪽 대학을 막연히 다시 갈 거라 준비한 마패로 학교에 실기 접수를 위해 준비해야 했다. 디자인 바닥에 그렇게 회의를 가졌는데 또 가야 하느것이 항상 부담되는 마음을 간직하고 일단 공부하는 것에 집중하고 또 집중하였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는데 언어가 아직은 미흡하니 실기를 접수하든 교수를 만나도 언어가 돼야 하기 때문에 이번 연도는 언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차근차근 대학의 원서 일정과 상황을 파악하려 하지만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야 할지 그리고 어느 카테고리에 들어가서 봐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해서 일단 언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원서를 넣는 방법도 차츰 알게 돼서 실기 시험날 직접 기차 타고 다른 지방을 가야 하는 날이면 새벽부터 가거나 그전날 방 하나를 잡고 여행을 떠난다.




독일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대학입시 제도가 다르다. 각 학교마다 시험일정이 달라서 각각의 학교 정보를 알아본 후 그 학교에서 맞는 조건에 맞춰 진행시키면 된다. 입학시기도 3월이 아니고 10월이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전화를 하고 싶지만 못 알아들으니 한참을 고민후 메일 작성을 완성시킨 후 메일을 보낸다. 그다음 날 답장이 오는데 꼼꼼히 읽어보고 쓰고 해석하는데만 반나절이지만 언어소통이 되었구나 하는 성취감으로 입시 노하우를 쌓는다.

예술대학은 실기가 항상 있기 때문 실기를 먼저 쳐야 하고 실기 비중이 높기 때문에 언어보다 실기에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한국서 준비해온 마패는 디자인대학을 위한 것이라 디자인 대학에 필요한 원서준비를 하였다.




학원에서 딴 C1을 들고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동생이 있는 카를수루에에 이사를 가기로 한다. WG에 가구들을 팔고 약간의 조바심과 새로움을 안고 동생이 사는 (Karlsruhe)카를수루에로 떠난다.

독일에 오면서 제2의 도전을 위해 나이를 잊고 조금씩 얼굴이 좋아지는 걸 느끼고 삶의 질과 만족감에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나의 서랍속 잠재력의 외출을 기대하며.


2008-2009

이전 01화 디자인 마패로 독일 미술대학에 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