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um Feb 24. 2021

독일 문화에 물들다

진정한 독일 생활을 이제 즐기자

"선아 너 이거 뭔지 아니?"
"..."
"여기가 예전에 유태인이 살았던 집이라는 곳으로 기념하기 위해 새겨놓은 거야."

교회 가는 길에 2년 동안 무심히 지나던 길바닥에 상하좌우 10cm로 금 색깔로 네모난 조각이 박혀있는데 그 위에는 사람 이름과 날짜들이 적혀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국가라는 자각으로 반성하고 살아가는 우수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이 조그만 금속판 안에 깨알 같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이름들과 날짜들이 적혀있었다. 당시 이 거리를 접해있는 유태인이 살고 있던 곳을 하나하나 명시하여 그들의 나이와 함께 적혀있었다. 그들을 추모하는 독일인의 반성하는 태도이다. 여기는 4명이니 가족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측을 해보았다.


예전 실화를 담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유태인을 상대로 한 나치의 만행이 정나라 하게 묘사된 1000명의 유태인을 구한 쉰들러를 묘사한 감동적인 영화가 생각이 났다. 지금은 그 세대 사람들이 세상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넘어서 숙연한 자세로 전 세계를 상대로 반성과 겸손의 자세로 문화적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또 베를린에 살 당시 유태인 박물관을 간 적이 있었다. 입장과 동시에 음산한 소리음과 조명 같은 것으로 곳곳에 독일의 역사가 정나라 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마치 수용소를 연상하는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있어서 전혀 화려하지 않고 숙연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그 박물관을 기획한 곳곳에 시선들을 응축시켰다. 무서울 정도로 높은 건물들 사이 조용하고 음산한 천장을 둘러싼 건축물이었고 그중에서도 사람 형상을 한 쇳덩이를 길바닥에 모아놓은 곳이 있었는데 지나갈 때마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발이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소음이 났다. 슬프고 불편한 그런 시간을 소리로 공간에 응축 시킨것이다.

건축가의 의도다.

독일은 세상을 향해 아픈 역사와 창피한 과거를 반성하는 태도로 이 같은 형태로 구석구석에 기념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의 세계를 향한 반성의 문화적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자기 할아버지가 잘못한 것을 자신의 일인 양 잘못을 사죄하는 행위인 것이다. 일본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이들이 정말로 반성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본인의 잘못을 덮고 변명하는 내가 자라온 가정도 그랬으니 난 이런 것이 ‘쇼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가기 전인 어학 비자 기간에는 문화적 차이는 있었지만 남다른 국민 의식은 몸소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소문을 듣게 되었다. 쾰른에서 한국인 여자가 여행하다 그녀만의 기지로 잃어버린 돈과 가방과 사과까지 받았다던 일화를 들었다. 요는 쾰른 돔 근처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물건을 훔치고 달아나려는 무리들이 그녀가 신고한 경찰이 오자 하나둘 모여들면서 오히려 피해자인 그녀를 가해자로 만든 것이다. 경찰도 조금씩 한국인 그녀를 의심하면서 졸지에 가해자로 된 그녀는 경찰을 상대로 “지금 독일 경찰이 내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조그만 나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차별을 하는 거예요? 예전 나치들과 다를 게 없잖아요.”라고 말을 했다. 그런 후 경찰은 그 즉시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그 무리들의 조사와 함께 잃어버린 돈과 물건을 찾았다고 한다. 독일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이 받는 차별대우 때문에 한국인이 많이 사용하는 사이트까지 올라와 한국인의 행동거지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올라와 많은 사람들이 조심하라고 권하였다.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던 2011년 학교 측의 실수로 난 행정과와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엄연한 실수인데 인정을 하지 않고 학교의 방침이라고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등록금이 두 번 빠져나갔는데 나의 입장은 한국의 등록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적은 비용이지만 생활비를 벌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상황에서는 피 같은 돈이었다. 잔뜩 예민했지만 독일어로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긴장한 채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다. 원활한 소통이 어려우니 사무적인 그들의 말투나 전문적인 어휘력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못 알아들으면 다시 얘기해달라고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고 난 요청을 하면서 그들의 무시하는 표정과 언행을 감지하였다.

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진정하고 이게 차별이구나를 생각하고 심호흡과 함께 나의 생각을 말하기로 하였다.


“혹시 지금 제가 외국인이라 차별하는 건가요? 전 제가 잘못한 것이 없어요. 학교 측이 실수한 것 같아요.”

난 즉시 허리 숙여 그들에게서 사과까지 받았고 그들의 대응처리는 생각한 것보다 빨랐다. 독일의 시스템은 해결하는데 너무 느려서 1-2주일을 걸릴 거라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라서 오히려 나도 놀라고 있었다. 변명이 아니라 인정과 사과가 신선하였다.



“langsam aber sicher”  

라는 독일어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독일의 문화상 모든 시스템이 느리다. 하지만 느린 만큼 실수 없이 확실하다.라는 말이 있다. 대응이 아주 느릴 거라 예상에 나의 발언에 대한 학교 측의 반응이 신기하면서 좋았다. 서로의 소통이 통했다는 것이 기뻤고 무엇보다 내가 소속한 학교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불협화음을 나 스스로 해결했다는 자부심이 크기만 하였다.


정직하고 느린 독일 문화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받은 독일인의 인상은 아주 친절하고 역사의식이 아주 높으며 국민의식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다소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희로애락을 지키고 보전할 줄 아는 그런 국민들이다. 난 이들의 국민의식을 배우기로 한다. 한국의 참다운 역사의식을 지키면서 나의 가치관도 하나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전 02화 베를린이지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