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은 항상 뛰더라
오늘도 작업에 대해 가치를 정립 중이다. 나의 작품은 주제가 심오하다. 나도 모르게 표현하고 싶은 매개체가 회화에서 설치미술로 이동되었다. 한계를 두고 싶지 않아서 일수도 있는데 다차원적인 공간에서 표현하는 과정들 안에서 조형미를 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워 사고체계를 항상 열어두려 한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준 규칙도 있었다. 당분간은 남의 작품을 보는 미술관 방문을 시간 내어 가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혹여 나의 무의식이 그들의 작품을 모방하여 나의 것으로 베껴 모티브를 꾸며야 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에너지에 소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철저하게 나의 예술 감각을 믿고 새로운 작품을 대할 때 내면적 필연성과 외면적 필연성과의 균형을 이루는 구심점 언저리를 표현하기로 한 것이다.
시험해보기 위해 1년이 지난 작품을 작업실에 그대로 두었다가 꺼내보고 그때의 또 다른 나(그림이나 작품)와 생각이나 환경이 바뀐 지금의 나의 공통점(변하지 않는 사명감에서 왔던 모티브)과 가치를 들여다보곤 오랫동안 내 안의 나로 표현된 작품을 응시하고 관찰한다. 그 과정은 작품에 대한 가치가 외부에 의존치 말고 먼저 내면에 무언가를 지키려 하는 바람이 커서이기도 하다. 어떤 시점에 터져 나온 봇물과도 같은 영감이 시간이 지나 잊혀버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인데 그걸 고려해서 작품에 몰두할 때에 항상 나만의 보이지 않는 공정과정이 있다.
그것은 작품이 시간이 지나도 대중들과 또는 무엇보다 지금의 나와의 소통이 변하지 않고 지속시킬 수 있을까 언제나 나와 작품을 대면시켜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다. 가장 많이 하는 행태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항상 긴장하게 되는 건 나도 모르는 무의식 속 주제(가령 삶과 죽음..)로 인한 외면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차이나는 세대)와의 소통의 일부 단절이다. 시대를 반영한 복구의 아이러니를 꼬집는 것이라 이야깃거리가 진지해 많은 요소들이 작품 곳곳 숨겨져 있기 때문에 지루함과 소통 단절을 우려해 항상 긴장한다. 황량함이 다소 묻어 나오기도 하다.
이란에서 온 어떤 한 친구가 내 작품 설명을 듣고는 BIOGRAPHIE라 진지하게 비판했었다. 작품과 삶이 따로 구별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너가 바꾸라면 바꿔야 하는 수동적 루트가 잦아 개인의 창의적인 무언가에 대한 실망과 한계를 느껴서 표현하는데 한계가 없는 미술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벌써 만 5년째이다. 처음엔 작품 색깔이 상업미술에 익숙해져서일까 무의식적으로 작품의 색깔이 내 기준으로 짐짓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사람들이 그룹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그 세계에서 사회구조상 느림보다는 빠름의 속도에 작품의 깊이보다는 외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어떤 이의 날카로운 KRITIK으로 인한 오랜 시간의 몰두로 이제 겨우 남의 시선에 관여치 않고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형태미는 대중성을 의미하는데 대중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거기에만 치우치다 보면 작품의 고유한 색은 찾지 못한다는 뜻이다.
소통의 부제는 대립적 구도의 불협화음이라 내 삶의 표적은 균형과 조화로움을 맞춰야 함이 소통의 이유다. 때론 침묵이 주는 유희도 있다는 걸 부인하고 싶지 않다.
아직도 공부해야 할 독일어와 씨름하거나 문화를 배우고 잊어버리면 안 되는 한국문화(아니 너무 빨라 겨우 쫓아가기만 하지만..)를 지키려 노력 중이다.
머리로는 속도를 내어 빨리 갈 수 있는 시간들이나 가슴으로 가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시속 1km인 나를 인정해주길 바라면서 20, 50, 100km 가고 있는 누군가와 공감하기를 원한다. 사람의 생각의 속도는 다 다르고 차이가 있지만 목적지는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일주처럼 말이다. 아울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나 형태와의 다이내믹한 소통 과정을 아주 천천히 다각적 각도에서 작품에 담기를 꿈꿔본다.
- 2016년 독일의 봄은 너무도 짧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