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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글맹글 Nov 24. 2020

2020년 11월 쾰른

부분 봉쇄 속 혼자 이사하기

독일 쾰른을 온 게 작년 2019년 11월 30일, 벌써 11개월이 넘었다. 그 사이 COVID-19라는 어마 무시한 바이러스로 인하여 한국에서 거진 반년을 보냈으니, 사실 여기 있었던 기간을 제대로 합산하면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는 이 반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여기서 두 번이나 이사를 하게 되었는가. 그래도 두 번의 이사 덕분에 비로소 꽤 마음에 드는 지금의 집에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지금은 아주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첫 번째 집 근처 모습

우선 첫 번째 집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지낼 당시 쾰른에 있는 기숙사도 구해지지 않고 아주 막막하던 시기에 쾰른 대학교의 international scholar center라는 곳에 문의를 하여 얻은 방인데, 70대 프랑스 할머니와 30대 중국 여자 교수와 함께 지내는 곳이었다. 방은 각자 사용하고 나머지는 공용이지만, 거실과 창고는 거진 할머니의 것이며 부엌의 식기세척기 또한 할머니의 것, 내 방의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는 책장에 있는 책들 또한 할머니의 것인, 뭐 말이 쉐어하우스지 할머니한테 얹혀사는 듯한 곳이었다. 하지만, 우편함에 내 이름을 못 붙이게 하거나, 월세를 이체하면 안 되고 현금으로만 드려야 하는 등, 수상한 냄새가 진동하였기에 추궁을 해보니 집주인과 sub-let을 하면 안 되는 계약을 해놓고 이 대담한 프랑스 할머니, 자신이 집주인인 양 당당하게 학교를 통하여 20년을 넘게 학생들과 교환교수를 받아 왔던 것이었다. 아무리 사기를 잘 당하는 나일지언정, 그래도 법대 4년, 법학 석사 2개, 여기서는 법학박사과정에 있는 나에게 있어 첫 독일의 이미지가 프랑스 할머니에 의한 사기라니. 바로 다음 날부터 쾰른의 기숙사 같은 곳을 담당하는 KSTW의 사무실에 매일같이 출근을 했다. 공공기관과 비슷한 곳인 KSTW, 월화목금만 문을 여는데 아침 10시부터 딱 2시간만 오픈하여 아침 일찍 도착해 줄 서서 기다렸다가 담당자를 만나자마자 불쌍한 표정 한껏 짓고 사기를 당하였다, 집이 아주 급하게 필요하다, 나에게 집을 달라, 칭얼칭얼 부탁을 하였다.


두 번째 집에서 유일하게 내가 꾸밀 수 있었던 창문 앞 공간

그렇게 하여 올해 2월에 얻은 첫 기숙사, 나의 방. KSTW에서 운영하는 기숙사 방은 580여 개인데 매년 교환학생과 나 같은 외국인 학생들이 엄청나게 와서 신청을 하여 올해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방의 8배가 넘는 신청건수를 받고 있어 아주 난감하다고 하였다. 나도 좋은 방, 안 좋은 방 따질 처지가 아니었기에 주는 대로 그저 감사합니다,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한 층에 10개의 방, 즉 10명이 사는데 그 10명이서 샤워실 3개, 화장실 2개, 부엌을 함께 사용하는 곳이었다. 물론 남녀 구분 없이 지내며 공용공간은 매일 청소해주시는 분이 오셔서 청소를 해주시지만, 어찌나 부엌과 화장실을 험하게 쓰는지. 방은 14제곱미터여서 원래 있는 침대, 책상, 옷장, 세면대(!)로 이미 꽉 찬 상태여서 요가매트조차 깔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합법적인 나의 집, 어떻게든 정 붙이고 살자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3월부터 유럽에도 COVID-19가 기승을 부렸고 봉쇄가 시작되면서 집에 꼼짝없이 있어야 했지만, 옆 방 사람들은 코로나 파티를 하러 다녔고, 어느 순간부터 기침 소리가 벽을 통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용공간이 많은 이 곳에서 나 혼자 조심한다고 과연 괜찮을까, 싶은 순간 옆 방 사람의 기침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불안 속에 한국으로 잠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가자마자 KSTW에 메일을 보내어 혼자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주절주절 메일을 보내 혼자 살 수 있는 방의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을 수 있었고, 그 후 쾰른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한국 혹은 유럽의 상황이 악화되어 미루고 미루다 9월에 드디어 다시 돌아왔다. 한국은 위험지역이 아니었기에 독일에서는 코로나 검사도 2주 자가격리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혼자 슈퍼 가는 것을 제외하고 2주간 방에서만 지내다 같은 연구실의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동안에도 나의 대기자 명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기숙사가 아닌 다른 방편으로 집을 구해봐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찰나였는데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에서 지내는 이 친구가 대뜸 자신의 집에 다음 달부터 살지 않겠냐는 것이 아닌가. 4월, 5월에 봉쇄되고 뒤셀도르프에 있는 남자친구와 못 만나 힘들었다며 동거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친구의 말에 아싸 가오리를 외치며 다음 날 KSTW에 같이 갔다. COVID-19로 방문은 받지 않는다며 문 밖에서 내팽겨졌지만, 메일을 보냈더니 웬일로 바로바로 대응을 해주셔서 이틀 만에 계약서 관련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


짐 들고 트램타고 다닐 때 모습

친구가 자신의 짐을 다 빼고 미리 나에게 키를 주어 일주일에 걸친 혼자 이사하기 프로젝트! 돈 좀 아껴 보겠다고 혼자 짐을 이고 지고 매일 3-4번을 걸어서 13번 트램타고 다시 8번 트램 타고 옮겼다. 트램 역에 있는 키오스크에 아저씨는 왠 동양 여자 애가 매일같이 열댓 번을 캐리어 들고, 작은 책장 들고, 상자 들고, 짐 들고, 왔다 갔다 거리니 갈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빤히 쳐다보셨다. 그러실 만도 하지, 캐리어만 들어도 쳐다볼 판인데, 뭔 서랍장이나 행거 같은 거도 번쩍번쩍 들고 다녔으니 놀라실 만도 하지. 우선 짐을 조금 옮긴 후, 짐 놓을 공간을 청소하고, 짐 정리를 한 후 다시 빈 가방과 상자들을 들고 예전 집으로 가서 다시 짐을 챙겨 옮기기를 수없이 반복한 후 어깨, 팔, 등, 다리 안 쑤시는 곳이 없어 나자빠지기 직전에 나의 이사는 끝이 났다. 2차 봉쇄가 이뤄진다는 무수한 소문들과 갑작스럽게 불어나는 확진자 숫자들로 움츠러들기 시작한 10월 마지막 주, 부분 봉쇄 시작 직전에 나의 이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세 번째 집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

지금의 집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여기서는 최대한의 기한 동안 있으려고 한다. 화장실을 갈 때에도 이젠 화장지와 소독제를 들고 가지 않아도 되며, 샤워실을 갈 때에도 샤워용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부엌을 갈 때에도 부엌용품을 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 내 물건을 마음 편히 놓을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는 것이, 편하게 볼일을 보고 언제든 방해받지 않고 샤워를 하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준 나의 예전 집에 소소한 감사를. 특히 예전 두 집은 0층이어서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여 커튼을 거의 항시 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집은 11층이어서 흰색깔의 밖이 보이는 커튼 하나만 장만하여 창에 걸쳐놓았다. 낮밤이 바뀌어 고생하던 나에게 있어 아침마다 햇빛이 방 안을 비춰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매일매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잘 지내보자, 나의 새로운 둥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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