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생밤에 칼집을 냅니다
슈퍼에서 밤이 보이길래 사실은 군밤이 먹고 싶어 졌지만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건 삶는 것이기에 군밤 대신 삶은 밤으로 나 스스로와 합의를 하고 생밤을 한 움큼 샀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밤 삶는 법을 찾아보니 굵은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씻어주고 물에 넣어 센 불에 10분, 약불에 20분, 그리고 10분간 뜸을 들인 후 찬물에 씻으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언젠가 밤 삶는 물에 꿀 한 숟가락을 넣으면 더 달고 맛있어진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나서 꿀도 추가하였다. 거기다 까서 먹을 때 쉽게 까지라고 삶기 전에 십자가 형태로 밤 하나하나에 칼집도 내어주었다.
밤을 다 삶고 까먹으며 아빠에게 전화를 거니, 독일에 밤도 있어? 밤이 몸에 좋대, 자주 사서 삶아 먹어, 하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몽블랑 혹은 밤 페스튜리 등을 생각하고 밤은 당연히 유럽에도 있는, 다들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쓴 단감 2탄과 같은 느낌으로 밤 이야기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잘 삶긴 밤을 까먹으며 다음에는 밤에 칼집을 넣을 때 한 번에 좀 세게 힘을 넣어야겠다 싶었다. 어떤 것은 한 번에 세게 칼집이 나있었고 또 어떤 것은 힘을 많이 주지 않고 여러 번 칼을 왔다 갔다 움직여 칼집을 내었는데, 전자의 경우 밤이 삶아지면서 깊게 칼집 난 모양대로 껍질이 밖으로 휘어져 아주 쉽게 벗겨졌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칼집을 낸 게 조금 민망할 정도로 아무런 효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살면서 한 번 마음먹고 집중적으로 하나에 빠져 시간을 보낸 것은, 그것이 공부, 게임, 운동, 혹은 사람에 대한 것 일지언정, 이에 대해서 만큼은 시간이 얼마큼 흘러도 그때의 공기, 온도, 냄새, 그 기억마저 오래가며 손을 놓고 있다가 다시 시작을 하여도 그때의 느낌의 70% 정도까지는 금방 돌아온다. 그래서 생밤도 한 번 깊게 칼집을 내야 40분이 지나고 삶아진 후에도 그 칼집을 밤 껍데기가 기억하고 있어 손가락으로 살짝만 잡아서 뜯어도 싹 벗겨지는 건가 싶었다.
한국에서는 혼자 생 밤을 사서 삶아서 먹을 생각도 안 해봤었는데 여기서는 생 밤도 사보고 삶아도 보고 혼자 까먹기까지 한다. 더하여 꿀을 넣어서 그런지 밤이 촉촉하게 잘 삶아졌다. 처음이지만 성공적인 꿀 넣은 물에 밤 삶기! 한동안 또 질릴 때까지 밤을 사서 삶아 까먹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잠시, 며칠 뒤 슈퍼에 가보니 생밤이 있던 자리에 다른 과일이 들어와 있었다. 가을이 끝나버려 밤이 이제 나오지 않는 걸까. 아쉽기만 하다.
앞으로 의외로 특이한, 이것도 유럽에 있었어? 싶은 식료품이 있는지 슈퍼 갈 때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안 그래도 슈퍼 가는 재미에 사는 나에게 이런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기분까지 안겨지다니, 슈퍼를 더 자주 가게 생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