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울린 한마디
독일로 돌아오기 직전이었던 올해 8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오빠의 직장암 수술 소식을 들었다. 아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고모의 아들이었기에 사실 사촌오빠라고 해도 나와 14살이나 차이가 나고, 평소에도 자주 볼 일이 없었던지라 잘 모르는 사이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사촌오빠의 암 수술 소식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수술은 8월 중순경이 될 것 같다는 전화기 너머로의 사촌오빠 목소리와 함께, 괜찮으면 삼촌 집 게스트 하우스를 2주 정도 빌릴 수 있냐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여 사촌오빠의 두 딸은 아직 6살, 3살이기에 수술 후 집에서 요양은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요양원을 가자니 COVID-19로 가족들과 아예 보지도 못 할 것 같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보니 삼촌 집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에이 뭐 그런 걸 물어보고 있어, 당연히 와도 되지!
아빠는 흔쾌히 오라고 하시며 요양원보다는 공기 좋고 사람도 없는 산속에서 산책도 하고 좀 움직이면서 지내는 게 회복도 더 빠를 수 있다며 사촌오빠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셨다. 우리 가족이 사는 집에서 걸어서 30초 정도 거리에 따로 지어진 한옥이기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갈 수도 있고, 사촌오빠 혼자 지내기에도, 사촌오빠네 가족이 와서 같이 지내기에도 불편함이 없는 곳이지만, 수술 직후 바로 와서 혼자 지내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되었다.
사촌오빠는 직장암 1.5기로 다행히 다른 곳에 전이도 되기 전이며 수술도 아주 깔끔하게 잘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안고 수술 후 4일 뒤에 퇴원하여 우리 집으로 왔다. 새언니도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을 혼자 나 두고 집에 가는 것이 마음이 걸리는 듯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오랜만에 본 아빠와 헤어지기 싫어하며 거기다 '이모 이모' 노래를 부르며 나와 같이 놀고 싶다고 집에 가기 싫어하여 원래 계획에서 변경된 사촌오빠네 가족 모두가 한옥에서 약 2주간 살게 되었다. 아빠, 엄마, 그리고 동생은 출근으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을 비우기에 내가 사촌오빠의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챙겨줘야 하는 담당이었는데 새언니가 같이 있어 주니 나의 짐이 줄어든 것 같아 마음이 훨씬 놓였다. 거기다 새언니와는 지금까지 2-3번 밖에 본 적이 없고 아이들도 만난 적이 거의 없었기에 나도 이번 기회에 친해지면 좋지 뭐, 라는 생각에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었다.
아이들과 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무엇이 하고 싶어 질지 모르고, 뭐가 먹고 싶어 질지 모르며, 어디에 가고 싶어 할지도 예측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아이들 제각각 원하는 것이 다르기에 한 명은 하던 놀이를 계속하고 싶어 하여도 다른 한 명이 언제 싫증이 날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아이들을 24시간 돌보아준 것도 아니고 새언니가 요리할 때, 사촌 오빠를 돌보아 줘야 할 때, 혹은 큰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갔을 때, 사촌 오빠네 집에 짐을 가지러 갔을 때,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며칠이 지나니 아침에 일어나 나를 깨우러 오는 아이들의 발소리만 듣고도, 아 오늘 하루가 또 시작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들이 한옥에서 올라오는 모습이 CCTV에 찍혀 보이기 시작하였을 때에도, 아 올게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심장이 쫄깃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전할 줄도 알고, 차분하며, 유튜브를 보겠다고 떼를 쓰지도 않고, 5번 보기로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천사 같은 아이들이었기에, 거기다 둘째는 나만 졸졸 따라다니며 꼭 붙어 있었고, 첫째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항상 싱긋 웃어주었기에 며칠 사이에 정이 엄청 들었다. 새언니도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공감 가는 부분도 많고 나와 비슷한 점도 많아, 꼭 친언니가 생긴 것 같았다. 어릴 때는 오빠가, 커서는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소망하던 나였기에, 새언니가 진짜 친언니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사촌 오빠는 정말 암수술을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회복을 하였고, 나는 바로 다음 날 독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날이 왔다. 엄마는, 좀 더 있다 가도 되는데 이제 아기들 돌봐 줄 사람이 없어져서 가는 거 아니냐며, 언제든 또 오라고 인사하였고, 나는 시원섭섭할 줄 알았던 아이들과의 헤어짐으로 엄청난 허전함이 밀려왔다. 언니는 이 2주가 정말 자신에게 힘이 되는 시간이었다며 연신 고마워하였다.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계속해서 고마워하는 언니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해졌다. 내가 용기가 좀 더 있었다면 언니를 따뜻하게 꼭 안아줬을 텐데, 그만큼의 용기가 나지 않아 그저 연신 등을 어루만지거나 팔부분을 쓰다듬는 게 다였다.
그런 새언니에게서 어제 오랜만에 메시지가 왔다.
요즘 뉴스에 독일 코로나가 심각하다고 자주 나오길래 아가씨 생각났어요~~ 아이들이 이모 생각 많이 나는지 할아버지 집 가자고 가끔 얘기해요^^ 그러면서 이모 독일 집에 갔다는 것도 기억 하더라구요^^ 멀리서 혼자 지내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아프면 더 서러우니 건강하게 잘 지내요~~ 쓰는 논문도 잘 완성할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지난번 같이 있을 때 나한텐 너무 힘이 되는 시간이었어서 더 생각이 나는 것 같아요^^ 삶을 항상 응원해요!!!
간추려서 적으면 위와 같은 내용이었는데 마지막 줄인 '삶을 항상 응원해요' 라는 문구를 보고는 순간 울컥했다. 내 삶이 뭐라고 응원을 해주는 사람이 있지, 내 삶이 뭐라고 이렇게 좋은 분이 응원을 해주지, 별에 별 생각이 다 들면서 내 삶을 다시금 긍정적으로 재정비할 수 있게 해주는 말이었다.
가끔 상대방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도 나에게는 어둠 속의 빛, 사막의 비와 같이 여운이 오래 남는 말이 있다. 반대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상대방은 그 말이 너무나 따뜻했고 그 말을 듣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며 몇 년이 지나도 고맙다고 인사하는 말이 있다. 물론 생각 없이 한 말에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아직까지는 더 많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후회되고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져 내 입을 요리조리 때리며 용기 내어 사과를 하면 정작 상대방은 기억도 못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10번 중에 한두 번이라도 상대방이 기억하고 있을 그 말들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맴돌며 내 가슴을 찌른다.
앞으로의 나의 삶은 상대방에게 따스한 힘을 줄 수 있는 말들만이 가득하였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삶을 항상 응원한다는 언니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