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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Sep 23. 2023

9. 해방, 꽃이 되다.

트라우마, 상처를 인식하고, 자유로워진 후

짧게는 근방 6개월, 만성적으로는 10년이 뭐야 20년이 넘는 시간을 어린시절의 상처와 싸우며 살았다.

정확히 말하건데, 약 10년간은 드문드문 생활속 이벤트로 인해 내 안의 상처를 의도치않게 만나게 되며, 황급히 닫아버리고, 화내고, 당황하며 살았고, 최근 6개월동안은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며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내 상처를 정면으로 직면하는 시간을 보냈다.


괴롭고, 따갑고, 슬프고, 아픈, 즉 자학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실로 효과는 엄청났다.


내가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을 직면하고, 그때 그 경험으로 인해 내 안에 만성적으로 생긴 수치심이라든지 그로인한 쑥쓰러움, 자아의 불안정함과 그로인한 파생효과들 그 모든 내 생활과 감정 전반을 꼼꼼히 살펴보며, 그 때의 경험이나 감정, 상처를 지금의 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그가 한 행동과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그 사람의 행위 자체의 미숙함을 인정하되, 행위자 자체를 증오하고 혐오해 무의식적으로 내안에서 나에게 상처주는 악인으로 잠정해 사람까지 미워하며 살던 감정에서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용서? 잘 모르겠다.

용서란 말은 내 안의 상처를 없는것처럼 억누르려 초조하게 노력하는 행위인것 같다.

나는 상대와 나 자신을 용서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1. 내가 입은 상처와 2. 자신 그리고 3. 미숙하거나 나쁜행동과 4. 상대 이 네가지 요소를 구분 함으로써 1과 3과의 즉, 행위끼리의 부딪힘이지 나와 상대 즉,(2와 4) 사람자체간의 부딪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분리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린시절의 상처를 직면하지 못하고, 즉 감당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린시절상처와 그로인한 거대한 파생효과로 아파하고 살았는가, 사람들속에서 매번 자신감이 떨어진다 생각드는 이유, 제대로된 바운더리를 설정하기 힘들다 느끼는 이유, 그 모든 것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더라.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저 깊이 쳐박아두고 모른 채 하는 행위는, 결국 나 라는 존재 자체를 스스로가 방치하는 행위로 이어지더라.


그러지말고, 나의 감정과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쓰디쓴 깨달음의 과정을 거친다면 '내면의 성장'이라는 목표에 다다를수 있는 거였다. 그럼 마음이 크게되고. 더 이상 상처받았던 시간에서 얼어붙은 마음상태로 살 필요가 없어진다. 얼어붙은 강물이 따뜻한 봄햇살에 녹듯 그렇게 마음도 유유히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다.


 이제는 내가 상처받던 시기인 초등 4학년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마치 초등4학년 어린아이가 세상의 어른들을 대하듯 사는 것이 아닌, 만 36살 성인으로서 주변 사람들이 동급의 인격체로서 사랑스러워보인다. 어리든 늙든, 남자든 여자든, 상처로 덮힌 채 살기위해 엇나간 모든 행동들이 거슬리지 않고, 인간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 이게 무슨 일이지?내가 상대를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가 나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의 일종의 프로젝션(반증)이라는데, 이제 드디어 내가 나를 수용하기 시작한건가? 나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난건가?자유롭다. 더이상 내가 어떤집에 사는지, 내가 어떤 직업을 갖던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세상에 대고 증명해야할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다수의 대중앞에서 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천사같은 사람인지, 또 얼마나 능력있고,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독립적일 수 있는 사람인지, 나의 외국어실력이 얼마나 완벽한지 필요이상으로 보여줄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종교나 알코올이나 성취 중독, 미디어 중독 또는 관계 중독 등 어떠한 것에 매몰된 채 안정을 느낄 필요또한 없음을 깨닫는다.



물론, 운좋게 태어난 몇몇의 사람은 어린시절의 상처가 딱히 없어 그자체로 열린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별다른 노력없이 쉽게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를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던 작던 어린시절의 상처를 겪고, 상황상 그 상처를 직면하고 독립할 여유가 허락되지 않아, 그냥 마음에 묻어두고 어른인척 연기하며 살아간다.


단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겁이나서 상처를 직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럴 필요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 같은 상처투성이, 부모 개개인, 그로부터 도망쳐나와 결혼한 남편을 비롯해 주변에 단 한명도 의지할 사람 신뢰할 사람 없이 말과 문화도 다른 외국에서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조금만 용기내 내 상처에 직면하고 아파하고, 인식하는 작업, 즉 이름을 불러주므로써 상처가 나로부터 뚝 떨어져분리되며, 자유를  때문이다.


끝이 없어보이던 마음의 탐색도 사실 표면과 같은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알아채주고, 깊이 공감(아파하고 슬퍼하고), 묵상해주고, 그렇게 충분히 알아봐주면, 이름붙여주면, 구름이 하늘에서 걷히듯 그렇게 둥둥 떠 멀리 가버리는 거였다. 두려워서 떠느라 쳐다봐주지 않고, 인식하지 않으면 인식할때까지 아무대도 안가고 무의식속에 가려져버려 그 후의 경험과 느낌과 생각을 왜곡시키고 망쳐버리는거였고...


이름을 부르니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김춘추시인의 시가 정말 맞다.


해방, 그 말이 ,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실천하는 느낌이다.





상처에 직면하는 과정의 세부사항은 브런치에 업로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재했었지만 쓰고 내 스스로 직면하는데에 목적이 있지, 남들에게 읽히면 오히려 좋지 않을것같아 저장만 해 놓았다는 표현이 맞을것같습니다. 하지만 제 도서 '섬세한 나'를 보시면 저의 대략적인 상처직면의 틀을 만나실 수 있으실겁니다. 여러분 마음에 자유를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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