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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May 29. 2024

인생 바닥 치면 그제서야 보이는 것

제대로 비워야 제대로 채워짐을 깨닫다.

사람들에게 바닥의 의미는 제각각입니다.


주식이 곤두박질 칠 수도 있고, 융자갚을일 한참 남은 집의 값이 반토막나 헛돈 갚는 인생에 대한 회의일 수 있고, 직장을 잃거나 사업체 부도위기일 수 있고, ...

모든 것을 한 대 묶어 '과연 바닥을 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이전에 통하던 방식이 통하지 않아 앞으로의 내 삶의 향방, 도무지 갈피를 찾기 못하겠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로 바닥침의 의미 나름 정의내려봅니다.


신이 있다면, 삶또한 공평하게 얄궂다 느끼는 때는,  속 엔자임뿐만 아니라 고통 또한 도미노효과처럼 '연달아' 몰려올 때 입니다.  하나가 무너졌다 생각했는데, 그 다음것도 무너지고, 옆에 앞에 뒤 난리가 나죠. 쌓아올리는 건 절대양과 질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누가 들으면 이제 갓 서른 아홉살짜리가 어른흉내 되게도 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쨋든 저는 그랬거든요. 남들 할 필요없는 생각을 사뭇 진지하게 하며 머리로 애써 이해하고 넘어가는 과정이 필요함은, 사실 저 자신에게는  만큼 삶이 감당하기 버거웠다는 거 이니까요.


계획에 없던 이민이 진짜 현실이 되고, 현지 어학실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나와 내 남편이 평생 쌓아온 실력과 경력들이 모두 한국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단 것을 확인했는데, 내 양다리는 어린 아이들 둘을 밧줄로 꽁꽁 매어놓고 있지, 이대로라면 갖고 왔던 한곗돈이 해외에서 전부 바닥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읽으시기 그 자체가 충격적이겠지만, 만국공통이라 통할거라 믿었던 내 미모에도 늘씬한 몸태에도 누구도 한국만큼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정말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 입니다. 이 곳 대학을 다니며 20대 아이들을 보며 나 자신이 대한 생각이 과대망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20대는 자체발광, 남자든 여자든 화장없이 가만있어도 너무너무 예쁘고 싱그럽습니다.


내가 구려진 것이 아니라, 이 곳은 원래 외모에 대해서 정말 별로 관심이 없을 뿐더러, 설사 감탄스런 외모를 가진 상대에게도 정상수준에서 건전한 성인이라면 절대로 상대의 외모에 대한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살기 편한 것이라는 것을, 개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을,  때로부터 10여년 늙고, 먹는거 그닥 없어도 추운 날씨를 강타하며 생존하기 위 저절로 두터워진 허벅지와 뱃가죽을 갖춘 지금에서야 알겠습니다. 큭큭.


미모빼면 암것도 없는 20대 였던 나, 이 곳 캐나다 겨울이 처음이어서 무슨 옷 입어야하는지 몰라 고작 영하 10도 한국에서 입던 모직코트 한 장에,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오지않던 버스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1월 영하 40도 한겨울 버스정류장에서의 짠내나는 내 모습을 기억합니다. 매일매일이 후회의 연속이었고 눈물의 연속이었고 하필이면 유부녀라 활용하지도 못할 미모 망쳐나 버리자며, 애들 잘때 혼자 주방으로 나와 냄비를 뒤짚어 내 머리에 박던 모습, 이마에 흐르는 피. 네, 저 정말 극단적 우울 상태였네요.


정말 어딜가나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상관없이 칭찬열매만 먹고 살았던 나는 칭찬일색인 한국을 벗어나, 남에게 관심없는 캐나다에서의 삶이 처음에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 하하.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높은 자존감을 갖고 태어나거나 노력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내 정서상태는 단지 남들의 시선과 칭찬이 만들어낸 일시적 착시효과나 거품이었다는 것을요. 나도모르는 새에 이 곳, 저 곳에서 '옛다' 던져주는 칭찬을 누구보다 빠르게, 5 seconds rule, 주워먹으며 칭찬에 중독된 채 생존했던 칭찬 또는 인정 중독자, 남에게 인정과 칭찬을 구걸하고 살았던 심리적 거지 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칭찬이 만들어내는 독성에서 강제 디톡스되는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차암 굿핏이었던 거죠.


잘 자다가도 새벽3시가 되면 숨이 막혀 잘수가 없어서 베란다나 앞뜰 문을 열고 숨을 헉헉 쉬어대기도 했었고, 공황장애가 찾아왔는 줄은 알았지만, 초기 이민자로서 이곳 의사는 물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힘든 시간을 스스로 이겨내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때 배운 게 운동습관이었네요. 기압차와 지나치게 건조한날씨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죠.


나와 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서 믿을 수 없는 의료진 대신 내가 나와 내 가족을 지키자며 겁도 없이 간호사가 되기위해  사이언스 패컬티에 입학하게 되었었고요. 아무리 캐나다는 누구나 어렵잖게 성적을 만들어 원하는 학부에 입학할 자유가 있는 나라라 대학의 일류, 이류가 없지만, 집이 가깝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집 앞 주립대를 다녔고, 솔직히 무슨 깡으로 그 많은 양의 공부를 하겠다고 지원하고 장대빗발치듯 매 학기를 다녔는지 솔직히 지금하라면 잘할 수 있다 장담 못드릴 것 같습니다.    


나이 많은 남편도, 캐나다란 사회도, 자존감 낮아 흉잡을 구석만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오직 나 스스로 하나만 믿어야만 했었어요. 불안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한국에서도 혼자 생존해야했던 사람이었지만 결혼해서도 상대가 지나치게 의존적인 동시에 통제적이라 서로 협의 할 사람없이 거의 혼자서,  나는 물론 내 가족의 삶을 전반적으로. 다, 꾸려나가야한다는 사실이 서글펐습니다.제가 느낀 힘듦에 대해 주요 포션을 차지했던 변수는,  남편과 저의 엄마효과였고, 나의 고통은 그에 따라 빚어낸 결론같은거 였어요.



상대를 컨트롤하려 들면도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의존적인 엄마 밑에 자란 내 남편은, 스스로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을 뿐더러, 자신이 마땅히 책임져야할 자신의 감정과 임무를 옆사람인 내가 대신 짊어지거나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것으로 간주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 입니다. 항상 엄마의 지시를 따르지만, 억울하게 책임은 자신이 져야했기 때문에, 그런사람들 있죠? 잘 되면 자기덕 뭐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상대방의 죄값, 매사 강박을 갖고, 옆사람을 비난해서라도 자신이 살아야하기에 마치 항상 본인의 실수에 대해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어쩔줄 몰라, 자신의 자식이든 배우자든 가릴 것 없이 비난과 책임을 던지는 사람이거든요. 여러가지 물건을 한번에 들고 움직힐 때, 유난히 떨어뜨리는 습관이 있는 남편인데, 원래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체적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어린시절에 엄마한테 과도하게 물건 떨어뜨리는 것 때문에 비난당하고 혼났던건지, 유난히 여러가지를 한번에 핸들링하는 것을 실수하고 어쩔줄 몰라 옆사람을 비난합니다. 모두다 지시적인 엄마때문에,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할 때, 필요에 의해 발달하는 포괄적이고 넓은 시각이 발달하지 못해서 인 것 같습니다.  또, 자신의 엄마처럼 나를 트로피처럼 생각하는 경향에 부흥이라도 했어야만 생각했는지, 내가 그에게 중독되어 그의 멋진 트로피와이프가 되어야한다는 강박에도 사로잡혔던것 같네요. (Dr. Henry Cloud & Dr. John Townsend의 책 Our mothers, ourselves의 분류를 참고했습니다. 이 책은 어떠한 카운셀러보다도 훌륭합니다. 엄마이슈가 있어 나 자신과 내 아이의 양육에 보다 깊은 정보가 필요하다 생각하시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자 합니다. 분류체계를 따라가시면서 책을 읽으시되, 독자님 개인사를 최대한 깊이있게 생각하면서 읽으셔야 효과가 좋습니다.)


그에 비해 항상 동생이 아프다는 상황 상, 정서적으로 unavailable하며, China Doll처럼 연약한 심리상태를 가졌던 부모에게서 큰 나는, 항상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보호(containment)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고, 늘 불안하며, 남의 아픔에 동화되어 문제있는 사람만 끌어당기며 codependent를 자처하는, 책임감 막중하고 불안한 yes girl이었으니까요. 남편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든 그냥 그 자체로 저와 분리해버리면 되는데, 나와 섞어 괴로워했던 것은 심리적 경계를 가르쳐주지 않은 제 엄마의 효과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스걸이 언제 예스걸에서 해방되시는줄 아시나요? 더이상 힘에 겨워 예스를 할 수 없을 때, 벼랑끝에서 죽을것같을 때 예스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니 현재 거절못하고 남에게 끌려다니는 분들은 어떻게 하면 벗어나지? 잔인하게 들리시겠지만, 방법은 더 많이 괴로우시면 됩니다. 자신을 바꾸려 고민하실필요없고, 본인이 견딜  있을 때까지 계속 예스걸로 사시면 됩니다. 남이 도시락 들고 따라다니면서 말릴때에는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끝끝내 종국에는 스스로 뜨거움을 버티지 못해 더 견디면 타죽는다 본능적 확신을 느낄 때, 발목에서 넘실거리던 물이 콧구멍 바로 밑에까지 차 올라왔을 때, 자진해서 살려줍쇼 납짝 엎드리며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기 되어있거든요. 아직 덜 고생스러워서, 역설적으로 계속 나를 Validation해줄 남을 '내가' 필요로 하기에 예스걸로 사시는 겁니다. 저에게는 본능적 확신이 선 계기가 바로 결혼과 이민이었네요.


여하튼 저는 도서관에 가 신간으로 나온 심리학책을 닥치는대로 흡수하게 되었고, Winnipeg Public Library에서 항상 심리학 연구에 집중 투자하는 미국산 신간을 구매신청하던사람도 저 였고요. 한 일년에 100권이상은 읽으며 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과 남에 대한 작문이나 독해실력도 이 때, 자연스럽게 길러졌던 것 같습니다.


각 사람에게 각 직업이 갖고 있는 의미는 사람의 머릿 수 만큼이나 제각각입니다. 지나고 보면, 제게 간호사라는 직업은 Codependency, yes girl, no containment 그 자체 였습니다.

내 아픔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캐나다에서 간호사가 되겠다는 선의 실천에 대한 주도적 의지,..라 착각하고 살았던 보호막 껍데기를 던져버릴수있게 되었었어요. 사실 보면, 간호사로서의 삶보다, 나라는 사람이 캐나다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일인분의 인간으로서 직업을 잡고 기능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긴 하는 걸까? 를 증명하는 허가증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프리리퀴짓에 해당하는 2-3학기의 대학수업을 수강하여, 4.3이라는 학점으로 간호대 본과 입학허가증을 받고, 용기를 내어 입학 거절의사를 표현하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내 스스로에 귀를 기울이며, 과학공부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 경험을 정의내리고 마주할 수 있을 때, 삶에서 그와 비슷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비로소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주인이 됩니다. 상처를 마주하고, 정의내린 후, 간이 지나,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됩니다. 좋다 나쁘다 할 것 없는, 그저 과거의 경험이 될 때, 우리는 새로 태어납니다.


비워야 채워진다고, 간호대 입학을 과감히 포기하고 과학 학위를 위해 5학기 남은 과학공부를 지속하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몸의 매커니즘을 연구하는 생리학과 대사를 체계적으로 계산한 생화학이더라구요. 한국에서는 문과라서 전에 하지 않았던 과학실험또한 즐기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제가 미세조절을 잘 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미세용량 즉 ug의 용량이 제게는 kg처럼 크게 느껴지고, 약간의 양으로도 상황을 컨트롤하며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부분이 재미났습니다. 섬세하며 지구력이 높다는 나 자신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합격시켜준다고해서 순순히 간호대를 입학했더라면, 나는 일반화학실험을 할 기회도, 생화학 실험을 할 기회도, 미생물학 실험을 할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정권 안에서만,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있고,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결정하는 내 과거 습관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에게 모험의 기회를 주니, 전에 없던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고, 나를 발견하고, 이해해 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여러 도전과 모험을 통해 내가 진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싫어서 못해먹겠는 일부터 쳐 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다보면 그림자를 거둬내는동시에, 빛을 엮어 쉐이핑해 내가 원하는 것, 내 형상을 찾아낼 수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싫어하는 것을 솎아 쳐내어가는 과정에서, 이게 내가 싫어서 싫은건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아서 싫은건지 잘 확신이 나지 않지만, 조금 더 하다보면 남보다 스스로가 더 잘 알게됩니다. 쓸데없이 참고 견디며, 매번 상황을 극복해내는 것이 최고가 아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기 싫은 것은 안해도 되며, 내게는 싫은 일이지만 남은 좋다며 더 잘 해낼 수도 있습니다.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끼리 모여서 머리 맞대고 해내도 모자랄판에, 하기 싫은 내가 억지로 그 안에서 상황을 버티고 이겨낼 필요가 없음을 캐내디언 아이들 사이에서 배웠습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속했던 한국 그리고 한국인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지구촌 사회 안에서 먼저 발달하고 세계의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선진국들이 이 사업 저 사업 배분해 던져주면, 이꼴저꼴 따지지 말고 내가 어떻게 생겼든, 주어진 바(를 맡은 바라고 하죠) 최선을 다해 그냥 잘해야합니다. 선진국아이들은 확실히 다르더라구요. 눈 감고 귀 닫고 영수는 곧죽어도 1등급 받아야하는 우리들과 달리, 진짜 하기 싫은 것은 과감히 솎아냄으로서, 삶의 효율성을 더하는 모습을 보며, 얼굴 죽상으로 억지로 하는 사람은 어딜가도 수동적일 수 밖에 없으며, 좋아서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과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배웠습니다.


이 곳에서 좋아하는 것을 자기주도적으로 선택해서 책임지고 끌고 나가는 힘이 어린시절부터 길러진 아이들의 눈에는 실력자와 실력자흉내내는 사람이 흰 바지에 빨간빤스 비치듯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일이겠구나, 자기 주관 없이 남의 기준에 맞춰 카피하고 사는 모습은 모양 빠지고, 쪽팔리니까, 그걸 하느라 억지로 힘들고, 비굴하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맘 먹게 됩니다. 여기선 어떤 직업을 가져도 세금과 보조금으로 거의 비슷한 삶의 수준을 살게 되니,  굳이 한국식으로 가장 사회적으로 능력있다 평가하는 인정받는 분야로 가서 인정받으려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저 내가 행복하고 즐거우면 누가 푸시하지 않아도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의 삶의 1등이  수 있고, 삶의 열정이 가득하며, 이 모습은 누구나 두 눈으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굳이 영혼없는 곳에 몸바쳐 살 필요가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요. , 국제적 하이어라키가 개인 삶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구나, 애들은 조금이라도 선진국에서 키우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래 진짜 중요한 건, 나 자신인데, 나의 생각과 느낌인데 나는 왜 그동안 나 자신을 완벽하게 배척하고 살았을까...이건 나 혼자만의 잘못이라 볼 수는 없고,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통합된 결정체일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제 글을 읽고 계실 독자님들께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이 곳에서 10여년동안 철저히 부서지고, 벼랑끝에 서 보며, 자기탐색, 자기 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캐나다 위니펙에서 얻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조차 빠듯한 대도시에서는 자기탐색 그런거 할 여유 안됩니다. 아무리 같은 캐나다라지만 서울보다 빡셉니다.)  이제 조금 행복이 뭔지 알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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