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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Oct 02. 2024

[한국이 싫어서] 캐나다 시민으로서 15년 산 얘기

인생 리셋까지 가능한 조금 더 여유로운 캐나다 삶

사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심 캐나다에도 하루빨리 수입되기대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는 영화제목처럼 한국이 싫어 캐나다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한국을 나와보니 한국에서 살 때 막연히 힘들었던, 무의식에 가둬두었던 것들이 의식화 되며, 캐나다에 나와 사는 지금이 만족스러운 요즘이다.


세상을 사는 것이 힘들어 스스로의 자아와 무의식을 거의 분리 상태에 가깝도록 불통하고 지내는 것을 기본값으로 본다면, 이 무의식의 의식화접근, 쉽게 말해 서울보다 조금 더 한가한 캐나다 생활로 인해 나의 내면과의 소통이 가능함은 사실  인생 리셋까지 가능함을 뜻한다.


내 평생 삶의 에너지 방향을 쥐고 흔들던 무의식의 횡포를 자의적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내면의 힘을 회복하면, 전에 없던 창조성과 내 안의 생명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 힘을 통해 삶의 방향 전환이 가능하게 때문이다.


이민을 왔다고해서 누구나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고, 이를 위한 자발적 노력과 시간이 요구된다.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지금 겨우 쌓아올린 것 마저 수포로 돌아갈까봐 남몰래 두려워 하는 마음,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마음, 괜한 긁어 부스럼일까 싶어 거부감이 먼저 든다는 당신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하신다면  한번 적당한 때를 잡아 스스로와의 화해와 용서에 도전하고 획득하셔서 마음의 평화를 이루시길 바란다.


마음의 평화 정도가 아니라 삶의 판도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테니까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다.







나의 학령기 아이들을 위해서도 단 한번의 시험으로 거의 미래의 8할이 결정되는 한국 시스템보다는, 초등학교보다는 중학교가,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가, 고등학교 보다는 대학교가, 대학교 보다는 사회생활이 갈수록 태산인 캐나다 제도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진짜 경쟁 같다고 할까.


아이로서는 사회에 의해 주입되는, 사교육에 의한 선행보다는 여타 외부 압박 없이 아이 스스로 주도성있게 삶을 살게 된다. 부모의 정보력이나 경제력 등 외부 어른들의 힘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는 불평등이 캐나다에서는 적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곳 캐나다도 비씨나 온주 그리고 몬트리올 등 대도시의 경우, 학원도 있고 과외도 있어, 자발적 학습 능력에 의한 변별력 획득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분명 있지만, 한국에 비할 바 없이 적다. 어떤 방향으로가도 소득차이가 크지 않기에, 스스로 내면의 힘을 끌어내어, 능력껏, 적성껏, 마음껏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환경이다.


물론 부자가 될 수 없지만,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불평등 속 가난을 느끼며 살아 가야만 하는 곳도 아닌 캐나다가 좋다. 물론 일부 대도시는 제외한다. 그 곳에서의 삶은 한국보다 더욱 힘겹게만 느껴진다. 한국인 이민자 1세대로서 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이다. 그저 허상만을 위해 나에겐 의미 없는 힘겨움을 극복해야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인종차별이라는 점을 이민 전에 막연하게 고민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민자 2세 그 이후가 되면 아이들 마저도 인종이나 피부색으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출신 국가로도 구분하지 않으며, 모두 같은 캐나다 사람으로 친구를 대한다. 


자신과 한집 사는 내 부모보다 피부색 다르고 종교가 다를지라도 한 교실에서  소통하며 큰 자신의 친구와 스스로가 더욱 비슷하다고 인식한다. 이민자 2,3대만 넘어가도, 그때부터는 사람이 인종, 민족, 종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영어를 못하는 사람으로 즉, 소통가능 여부에 따라 나와의 이종과 타종이 구분된다고 한다. 겹치는 생활권을 반영, 타당성 있는 주장이다.


24세이후 캐나다에서 15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이 곳 문화보다는 내가 낳고 자라 더욱 가깝다 생각하는 한국의 말과 문화와 멀어지고 있는 현실과 별개로, 인간으로서의 전인적 인격이나 삶의 태도, 가치관이나 습관등을 만드는 시기인 학창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1.5세나 1세인 내가 이 인종차별이나 언어차별이라는 것이 짊어져야하는 짐이지 2세, 3세가 되는 내 아이들이나 손주들까지 연대로 짊어져야하는 짐은 아니기에 나에게 부분적으로 주어지는 차별을 감안해도 크게 보면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 이점은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같은 캐나다 안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주에서 사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국인이 많은 벤쿠버나 토론토의 경우, 아무리 어린나이에 이민온데도 강력한 한국인 아이덴티티를 지키며 성장, 성숙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어보인다.


여기서 인간 사이 부딫히고 성장해가며 깨닫는 바, 사람들이 내게 하는 차별이라는 부분을 걱정하거나 그들과 무작정 같아지려고, 닮아지려고 하기 이전에, 기준도 불분명하게 무조건 기존사람들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 또는 오기를 갖을 필요도 없고, 어디서든 내가 내 삶의 영역과 방향을 먼저 결정하고, 주체적인 시각으로 살면 그만이다. 이 자세가 선행되어야함을 깨닫는 요즘이다.


이민자 1세대 또는 1.5세인 우리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필요한 만큼만 언어(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면 되고, 그 이상으로 막연히 원어민 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원어민과 같지 않다고 해서 막연한 무능감이라든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원하지 않는다면 과감히 영어를 쓰지 않는 환경을 구성하고 살아도 무방하다. 언어적으로도 무방비 상태 즉, Assimilated 될 필요가 없다. 주체성을 지키고 살되, 딱 필요한 만큼.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만 언어 구사를 하면 모두가 다른 캐나다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Assimilation

여기서 잠깐, assimilation이란 식민지 지배를 위한 개념으로 통치국의 가치를 피식민지의 사람들이 점진적 또는 급진적으로 무의식적 내재화하게 세뇌시키는 것을 말하며, 꼭 식민지배에서 만 아니라 한 세상이 원하는 가치를 구성원 전반에게 가스라이팅하는 모든 형태의 전략을 말하는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 용어이다. '동화'전략은 구성원이 자신 개개인의 본연의 가치관과 무관하게 사회적 암묵적 힘에 의해 일원화된 가치과 기준을 바탕으로 개개인을 무자비하게 재단하고 판별하도록 하는, 비인간적인 그러나 실재적이고 통치자입장에서 아주 효율적인 방식이라 씁쓸하다.


한국사람이라서 아주 많이, 이민후부터 조금 전까지 끊이지 않고 가장 길게 고민 했던 주제였다.


고민의 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내가 한국에서의 현실적 어려움을 직면하기 전에 이민이라는 선택을 해서 일 것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결정한 사람들은, 그들이 나보다 훨씬 현명해서든, 한국에서 잘 안 풀려서든, 이민을 결정하기 이전에 한국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미 고민을 끝낸 후에 캐나다든 뉴질랜드든 호주든 외국으로 떠났을 테니까.


엄마가 공부해라 말하기 이전에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한 모범생이었으며, 고3때 체중 53kg를 비롯, 단 한번도 과체중은 물론 정상체중 중반측에도 도달해 본 적 없이 외모관리에 강박적이라 외부의 나를 향한 외모지적을 애초에 철통방어했으며, 계획했던 것도 아니지만 한번도 친척들 입에서 캔디 결혼은 언제하냐, 거의 반사작용에 가까운 생각 없는 재촉을 머릿속에 아직 떠올리기도 이전인 24살에 결혼했다. 요즘 세상엔 임신이 어려운 사람도 많던데 결혼 동시에 임신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출산했다.


사람들은 세상 불평등하다 상대적 박탈감이다 말도 많지만 세상의 기대에서 어긋날 기회 자체를 상황도 내 자신도 나 스스로에게 주지 않았기에 내가 세상이 원하는 주류적 가치에 나 자신을 맞춰가며 살았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조차 없었다.



나와 달리 천적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거나, 나와 같이 후천적으로 안전에 의한 욕구가 위협받아 누가 뭐랄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틈도 없이 자신을 철통방어하느라, 세상 가치를 내 것처럼 순식간에 내재화해야하는 사람은 상대적 불평등을 경험할 리 자체가 없다.


한편 한번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느라 또는 생득적 이유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갖지 못해 내 인생이 왜 이모양인가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별, 종교, 인종, 경제력, 학벌 등으로 인한 세상의 차별(segregation)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받고 따돌림을 받는 자신이 정작 지극히 정상임을 간파하기 어렵다.


위에 말한 두 가지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세상은 도무지 찾아봐도 둘 사이 접점이 없기에  우리 모두 assimilated되었다는 생각과 양자간 소통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내가 한국사회에 아주 많이, 자의로 그리고 생득적으로도 assimilated 되어 살던 사람이었다는거다. 

인생 행복 그래프를 그려본 것,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 꼽은것들을 보면 진짜 내 스스로의 가치달성이라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원하는 기준을 충족시켰거나, 대중이 원하는 집단안에서 소속감을 맛보았을때 라는 점에서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불안했을테지, 그 당시로서의 최선책이었겠지 하며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나 자신을 보듬는다.


그래서 이 곳에 이민와서도 자꾸만 사회의 주류적 생각을 찾아 다녔고, 그것과 같아 질 수 없는 나를 보며 자꾸만 자괴감을 느끼며 괴로워했던 것같다.


언어도 문화도 입고 다니는 옷도 직업도 가치관도 심지어는 출생성분, 타고다니는 차, 사는 집 등 한 곳을 보며 한 방향으로 달렸던 한국에서의 삶의 태도가 있다보니, 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캐나다 생활에서도 나는 자꾸만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같은 기준 같은 것을 찾아 헤매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폭력일 수 있음을 최근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되었다.


 어느 집단이든, 어떤 주제든, 어떤 결론이든 관계없다. 그저 다수의 일반적인 생각의 흐름과는 반대되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황당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 배척하는 한국사람들 무리를 보며 깨달았다. 설사 그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거나 성숙하다 해도 다수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면 가차없이 묵살되거나 조롱당하는 모습을 보며 말이다.


 사실  사람들이 이민을 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만 귀를 열고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사회가 싫은 것이 아니라, 사실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타인들인정과 감탄을 받지 못해 해외로 온 것이 본질임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정작 그들 또한 한국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편안히 살았더라면, 이민 전 본인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획일화된 기준만을 주장하며 본인들에게 상처 준 기존 사람들과 과연 다른 시각으로 살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 사회적으로 힘을 받지 못하고 산 사람이 주장하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란 사실 까놓고 말하면, 타인을 향하는 사랑이나 화해를 뜻하는 것이 아닌, 소외받고 차별받았다 생각하는 스스로에 대한 피해의식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겉으로는 사회적 다원주의나 인류애 따위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도 결국은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치다 못해 과장된 자기애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것 일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그와 그녀의 사고방식, 삶의 방향을 저격하고자함이 아니라, 정작 스스로가 자신의 욕구를 외면하고 있음을, 문제의 본질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잘못 짚고 있음을, 그것이 스스로에게나 상대에게 얼마나 허망하고 가혹한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가 어느방향으로도 이루어 질 수 있음을, 좌와 우가 사실은 같은 것임을 맘 쓰리게 또 한번 체험했다.


서로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해야함을 가슴깊이 느낀다.


맞다 틀리다를 가려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정답인 동시에 모두 오답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을 통해 다른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이다. 취향의 차이에 의한 다른 의견 제시일 뿐임을 받아들이면 그만인데 , 그것을 스스로의 존재대한 상대방의 부정이라 오해할 필요가 없음을 아셔야한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했다는 오해로 인해, 그저 나와 의견이 달라 다른 의견을 내는 상대를 쳐내버리거나 몹시 불안한 나머지 상대를 경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보존하려 할 필요가 없음을, 서로 달라 감정적으로 편치 않은 그 순간의 상황에 대한 포용력을 가질 수 있는 진짜 성숙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의  본능적이고 유치한 무의식과 세상에서 규범하는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내재화하고 굳게 내 것이라 믿는 자아 사이의 분열을 가장하려 상대의 단점에 자신을 투사하여 상대를 경멸하고 비난하는 행위는 아직 성숙에 달성하지 못한, 사춘기 전의 행위인데, 세상살기가 빡세서인지 자기자신과 화해할 새를 이민와서도 만나지 못한 탓에 심령이 가난한 채로 사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바른 말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상대의 비난과 경멸, 조롱... 그로 인한 나 자신과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뿐이다.


치장이 까발려지고, 자신안의 본능과 가까운 무의식을 들켜버렸다는 당혹스러운 감정으로 번뜩 뜨거운 화를 내뿜는 사람들과 무슨 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진실한 대화의 가능성을 스스로조차 닫아버리는 사람들과 무슨 우정을 쌓나.


그러니 이민와서까지 남에게 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 나란 인간이 무가치하지는 않다는 것을 너로서 증명해달라 뭐 이런식의 어필로서 인간관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한국 사람과든 외국인과든 캐나다에서 오랜 세대또한 거주한 캐네디언과든...


나 자신과 소통을 통해 화해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나 자신을 포용한 후에만 진정한 나를 향한, 타인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짐을 배운다. 


나의 단점과 치부를 끌어 안는 순간, 근원적이라 믿었던 수치심이나 죄의식이 사라지고, 삶의 에너지 방향을 다잡게 된다. 거기에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의 단점을 무리 없이 포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한다. 나 자신에 대한 포용과 화해 그리고 사랑이 다른 대상에까지 무리 없이 전염되며, 세상과 사람들이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진정한 관계 회복이라는 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수용에서 시작됨을 몸소 깨닫게 된다.




캐나다에서의 아이들 학업.

사람들은 말한다. 학업성취도가 비교적 높은 주에 살아야 아이들에게 좋지 않겠냐며...

내 생각은 정 반대이다. 이 이야기는 추후에 자유롭게 풀어볼 예정이다.


과일과 고기값, 우유값이 싸서 좋다. 충분히 먹고 마시고 사는데 부담 없다.


집값도 싸서 좋다. 물론 월세가 비싸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연락을 한다면 충분히 절약할 수 있는 팁을 가르쳐드릴수는 있다. 이 곳에서는 말을 삼가도록 한다.



어느 동네의 어느 집에서 어느차를 몰고 어떤 직업을 갖고 사느냐보다 행복을 위해 정작 중요한 건 내 삶의 내 에너지 방향에 대한 주체성 인식임을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였다.


영화도 보기전인데, 이 영화의 감독님은 어떤 관점으로 해외에서 살겠다고 떠나는 한 인간의 삶을 다루고 그리셨을까... 기대되는 영화를 위한 작품 기대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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