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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돼지 같아서 안 돼

무례한 사람에게 웃지 않으며 대처하는 법

by 김버금



여덟 번째 마음,

당당하다



언제부턴지 ‘말’을 다룬 책들이 눈에 많이 띈다. ‘언어의 온도’, ‘말이 칼이 될 때’,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줄지어 선 책의 제목들을 쭉 따라 읽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살 쏘는 총이라고 아프지 않은 법 없듯, 살살 찌르는 말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말은 아니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잘 대처하는 것만큼 잘 끊어내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말의 무게를 모르던 때가 있었다. 듣고 있는 상대에게 마음을 기울이기보다 말하고 있는 나에게만 온 마음을 쏟았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상처를 많이 받아본 사람이라더니 말의 무게를 비로소 알게 된 무렵도 타인의 말에 내 마음이 무너져본 후였다.


말로 무너진 마음은 다시 말로 쌓아야 했다. 사람을 알고 만나고 헤어지기도, 다시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습관과 일부러 하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중 실수하지 않으려 들인 습관은 말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꼭 두 번 생각하고 말하는 것. 나에겐 단순한 실수인 말이 혹 아픈 말은 아닐지 생각하고 아픈 말이 아니더라도 아프게 하지 않을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반대로 일부러 하려 노력하는 것은 무례한 사람과는 곧바로 멀어지는 것이다. 무례한 말에 웃으며 대처하고서 무너진 마음을 다시 쌓는 것보다 무례한 사람과는 정도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오랫동안 이 두 습관을 지켜오면서 타인에게 무례를 범하지도 받지도 않으며 그럭저럭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례를 범하고 동시에 받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른 채로 말이다.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방금 감은 머리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떨어졌고 그 와중에 신고 싶은 양말 한 짝을 찾지 못해 온 서랍을 다 뒤지던 중이었다. 급한 대로 머리에 대충 수건을 두르고 아무 양말이나 일단 주워 신었는데, 옷장 앞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행거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옷들이 꽉 꽉 들어차 있었지만 입을 옷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아무 옷이나 잡히는 대로 휙 휙 넘기며 생각했다.



아, 이건 안 돼. 목 올라오는 옷이라… 나는 목이 짧아서 안 어울려. 이건 입고 싶은데 입으면 내가 너무 돼지 같을 것 같아… 아무래도 살 좀 빼고 입어야겠지. 이런 오프숄더는 왜 샀지? 어깨에 징그러운 흉터도 있으면서… 이따 밥 먹고 배 나올 수 있으니까 짧은 티도 안 되고. 안 그래도 요즘 살쪄서… 이 옷도 안 돼. 이 옷도 아니야. 이 옷도 안 돼. 이 옷도 아니야…….


행거의 왼쪽에 있던 모든 옷들이 오른쪽으로 밀려날 동안 내가 나에게 끊임없이 했던 말은 하나였다. 나는 살 쪄서. 나는 뚱뚱해서. 나는 돼지 같아서 안 돼. 그 말들이 내 마음에 아픈 생채기를 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습관처럼 생각했던 말들이었다. 그 날 행거의 모든 옷을 포기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입고 싶어서 산 옷들조차 마음대로 입지 못하게 함부로 말하는 나는, 나에게 가장 무례한 사람이었다.



그 날은 결국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고서도 여전히 옷장 앞에 두 발이 묶여있는 기분이었다. 발 붙일 곳도, 마음 붙일 곳도 잃은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네모난 창문에 풀 죽은 내 얼굴이 비쳤다.

너는 살만 더 빼면 예쁠 텐데, 너 가까이서 보니까 못생겼어, 웃는 얼굴은 좀 별로다, 화장 좀 하고 다녀, 눈이 왜 이렇게 짝짝이야? 여자가 오십 키로 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타인으로부터 들었던 무례한 말들이 물밀듯 떠올랐다. 다시 내가 나에게 했던 말들의 주어를 '나'에서 '너'로 바꾸어 생각해봤다.

너는 이런 옷 안 어울려. 너는 뚱뚱해서 안 돼. 너는 돼지 같아서 안 돼. 타인에게서 들었을 때 몇 번이고 상처받았던 말들을 나는 나 자신에게 몇 번이나 말했던가. 그동안 타인에게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으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 나는 얼마나 무례한 사람이었던가. 붐비는 지하철에서,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나는 다시 연습하는 중이다. 사람의 말에 무너진 마음을 사람의 말로 쌓아 올렸듯 이따금씩 내게 하는 습관적인 혼잣말들을 일부러 꺼내어 들어보기도 한다. 그 말이 나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그 말을 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들어보기 위해서다.


날씬하게 마른 연예인을 부러워하고 그렇지 않은 내 몸무게에 집착하는 나를 볼 때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그 기준에 맞춰야 하는지 묻는다. 그만 좀 처먹어야지, 하는 말이 습관적으로 입에서 나올 때면 내가 맛있게 먹는 건 왜 늘 처먹는 것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다. 타인을 존중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존중하기 위한 연습이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물이 떨어지는 머리로 방 안을 휘젓고 다녔다. 똑같이 젖은 머리로 한쪽 양말만 신은 채 똑같은 옷장 앞에 섰다. 그럼에도 이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는 무례한 내가 불쑥 나타날 때마다 그런 나에게 당당하게 대하려 노력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소중해. 나는 살이 쪄도 소중해. 다른 사람의 말이 어떻든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변함없이 소중해. 그러니 나에게 무례하지 말자. 나에게 함부로 하지 말자. 행거 앞에서도 잠들기 전 눈을 감고서도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말은 그것이다. 무례한 나에게 당당해지는 일, 나를 사랑하기 위해 하는 매일의 다짐이다.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

*말글 ⓒ /your_dictionary_

*그리고 사진 ⓒ /2nd_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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