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찰나의 시간이 필요한 날들
여섯 번째 마음,
널찍하게 트인 큰 카페보다는 작고 소박한 카페를 좋아한다. 조그만 문을 열면 꼬마 스탠드가 반갑게 맞아주고 다정한 인사가 느리게 들려오는 곳. 내가 좋아하는 그런 작은 카페들은 주로 골목길에 숨어있어 집 앞, 혹은 큰 길의 카페를 가듯이 자주 들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은 왠지 여유가 있고 싶은 기분일 때, 동시에 뭔가를 하긴 해야 하지만 하루쯤은 하지 않고 싶은 기분일 때, 이러저러한 기분들의 교집합이 되는 날에 보물찾기를 하듯 혼자 한 군데씩 다녀와 보곤 했었다.
보통의 일상을 지내는 방식이 그처럼 자유로운 편이긴 하지만 가끔은 그 때문에 도리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여러 날을 보내기도 했다. 미리 일정을 짜놓기보다 그 날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면 도무지 무엇도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자유로운 부자유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런 날들이, 사실 꽤 오래 이어졌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에도 그런 기분 따위는 영영 들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의 일이다.
며칠 전, 그런 카페만 골라 찾아다니는 나의 성격을 알고 있던 친한 선배가 나를 작은 카페에 데리고 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봤는데 딱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너 나중에 그런 카페 하고 싶다고 자주 보러 다녔잖아, 거기 인테리어가 좋더라고, 말하며 자신 있게 앞장을 섰다.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하고 뒤를 따랐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라기 보단 오늘과 같은 핑계라면 전의 그런 기분을 한 번쯤 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내심의 기대 때문이었다.
쾌활하게 앞서 가는 선배에게 대략의 위치를 물으니 한강과 만나기 직전의 홍제천의 끝, 이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상한 대답이 재밌어 오랜만에 허리를 젖혀가며 웃었다. 상가 사이에도 주택가 사이에도 있는 곳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명랑한 설명이 덧붙었다. 맑은 바람이 부는 선선한 초여름의 저녁이었다.
선배의 말은 사실이었다. 키 작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 칠이 벗겨진 간판이 달린 곳, 네다섯 명이 모여 앉으면 꽉 차는 네모난 테이블 하나가 전부인 곳. 한강과 만나기 직전의, 홍제천의 끝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 어때? 내 말 맞지? 하는 선배의 눈짓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주문하고서 하나 뿐인 테이블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우리가 들어온 작은 철제 문, 벽 한 쪽을 대신한 커다란 유리창, 그 밑에 옹기종기 늘어선 작은 선인장들, 테이블 위의 목이 긴 꽃 두 송이도. 언뜻 보이는 저 초록색 과일은 매실일까 라임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데 어디선가 두런두런 조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의, 작은 주방에서였다.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부부로 보이는 젊은 사장님 두 분이 작은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무언가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지막한 이야기의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 다정한 모습에 두 눈이 일순 매료되고 말았다
꽤 오랫동안 두 분의 조용한 목소리와 애정 어린 눈빛, 따뜻한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봤던 것 같다. 부러움 팔 할과 조금의 서글픔과 쓸쓸함을 담아. 선배의 기대와는 달리, 가게의 인테리어보다도 부부의 모습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 사이에 주문한 커피를 들고 온 선배가 말을 꺼냈다.
“부러워할 줄 알았어.” 몰래 보고 있던 걸 혹여 들켰을까 싶어 황급히 시선을 떼며 모른 척 되물었다.
“뭐, 네? 뭐가요?”
“가게, 부러워할 줄 알았다고.” 선배가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네 눈빛이 그래.”
다행이랄까, 가게가 마음에 든 걸로 보였다는 것이. 안도감에 순간 웃음이 나왔다. “저, 그게 사실은…….”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려던 말을 흐리고서 어색하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도 모르는 내 말들이, 내 마음들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미웠다. 부러움 팔 할, 슬픔과 서글픔 조금의 가장 밑바닥에는 나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아직도 그를 떠올리는 내가, 지독하게 미웠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잊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제자리인 걸까. 그 사람이 생각날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이었는데 나는 왜 바보같이 이러는 걸까. 오랜만에 기분 좀 내보려 마음먹고 온 건데 나는 왜 또 그때로 돌아가고 마는 걸까. 도대체 나는 얼마나 모자라서, 도대체 나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도대체 나는 몇 번이나 헤어져야, 도대체 나는…….
답보다 눈물이 먼저 나올 것 같아 얼른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 찰나에 잠시 괜찮아질 수 있기를. 정말 그런 것은 아니어도 그런 척을 할 수 있을 정도. 그래서 나 자신을 잠시 속일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천천히 커피를 내려놓으며 고르고 고른 한 마디를 꺼냈다.
“그게, 사실은 여기 정말 마음에 들어요.” 선배가 씨익 웃었다.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찰나와 함께 마음을 삼킨 건. 나도 씨익 마주 웃어 보였다. “진짜, 인테리어에만 눈이 가는 거 있죠.” 커피 잔을 쥐고 있는 오른손에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멀리,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다만, 나는 아직 헤어지는 중이라고. 커피 한 모금의 찰나, 그 찰나처럼 내겐 괜찮아질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뿐이라고.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진, 누구를 보고도 그 누구를 떠올리지 않게 될 때까진, 그래서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될 때까진, 내 손의 커피 한 잔을, 더 이상 아프지 않고도 마실 수 있을 때까진. 내겐 시간만이, 다만 시간만이.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