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마음만이 전부여도 괜찮아
일곱 번째 마음,
일기와 그리 친하지 않다. 다이어리 한두 개씩은 늘 곁에 두고 있지만 매일 써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전에도 그랬었나,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초등학교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의 나에게 일기 쓰기는 매일 해도 매일 생기는 귀찮은 숙제였다.
일기는 하루를 계획하는 습관을 들여주는 고마운 숙제이지만 그 때에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알 리가 만무할 뿐. 그저 미루고 미루다가 선생님이 검사하는 전날쯤이 되어서야 각종 상상력을 발휘해 어떻게든 채워가는 식이었다.
항상 그렇게 얼렁뚱땅 모면하는가 싶었지만 위기였던 날도 있었다. 당장 다음 주가 일기를 내는 날인데 내가 가진 모든 상상력을 다 쥐어짜내고도 남은 일기를 도저히 채우지 못하고 있던 날이었다. 소재가 필요했던 나의 머릿속에 반짝 떠올랐던 것은 엉뚱하게도 어린 동생의 일기장이었다.
그날 밤, 동생이 잠든 것을 확인한 나는 살금살금 일어나 일기장을 챙겼다. 그리곤 책상 밑에 스탠드를 바짝 당겨다 두고서 몰래 읽기 시작했다. 써먹을 만한 괜찮은 소재 뭐 없나 찾던 중에 곧 눈길을 끄는 일기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아빠의 생일에 쓰여진 따끈한 일기였다.
일기의 내용은 단순했다. '아빠의 생일 날, 나는 그 동안 모았던 용돈 만 원을 가지고 아빠랑 엄마랑 언니를 데리고 빵집에 가서 맛있는 케이크를 사주고, 근사한 양복점에도 데려가 아빠에게 멋있는 넥타이도 사주었다'는 터무니없이 황당한 내용의 일기였다.
동생보다 기껏 한 살 많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돈에 대한 개념이 있었던 나로서는 만 원으로 이 모든 선물을 샀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 싶었다. 심지어 선생님이 검사하시는 일기장에다 이처럼 허무맹랑한 허풍을 쓰다니! 어린 동생의 치밀하지 못한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책상 밑에 숨어 몰래 읽던 나는 도저히 이 재밌는 걸 혼자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안방으로 가서 아빠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손가락을 입에 붙여가며 쉿, 쉿, 조용히 따라오라고 내가 재밌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말이다.
늦은 밤, 잠든 줄 알았던 큰 딸이 별안간 조용히 따라오라며 방으로 이끌고 책상 밑에는 엉뚱한 스탠드가 서있으니 아빠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이었을 테다. 그래도 아빠는 묻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주었다가 아빠, 이거 쟤가 쓴 일기인데 진짜 웃겨! 빨리 읽어 봐! 라는 나의 재촉에 빙긋이 웃으며 조용히 넘겨받아 읽기 시작했다..
이 웃긴 이야기를 아빠가 다 읽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는 고통이란. 나는 어서 아빠가 일기를 읽고서 나처럼 몸을 꼬아가며 웃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다 마침내 아빠가 일기장을 천천히 덮었을 때. 어때? 진짜 웃기지? 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본 아빠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아빠는 울고 있었다.
웃겨서 포복절도하는 아빠의 모습을 기대했던 나는 아빠의 눈을 보고서 일순 당황했다가 내가 실수한 것 같다는 부끄러움, 그리고 아빠가 운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과 무서움까지도 그 짧은 순간에 느꼈던 것 같다. 그 날은 어떻게 다시 일기장을 몰래 접어다가 제자리에 가져다놨는지 아빠는 어떻게 안방으로 가고 나는 어떻게 잠자리에 누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 한 가지만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쓰고서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던 기억. 나에게는 그저 웃기게만 읽혔던 그 일기가 아빠에게는 무엇이었던 걸까 하고, 아홉 살 인생에서 가능한 한 깊은 부모의 마음을 짐작해보며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려 노력하던 기억. 나는 그날 밤 여러 번 동생이 되어보기도 했고 다시 여러 번 아빠가 되어보기도 했다.
일기를 보고 난 뒤의 다음 날엔 늘 그렇듯 나의 폭로전과 비웃음, 동생의 분노와 눈물의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였지만 어쩐지 나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그리고 오늘에 이를 때까지도 그 날의 일기에 대해서는 오래 함구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나와 동생은 두 손으로 세기엔 손가락이 한참 모자란 나이가 되었고 아빠의 생일엔 동생의 일기 속 케이크보다 더 긴 초가 여러 개 세워졌다.
그러면서 어렴풋하게 알게 된 것들도 있었다. 아빠가 평생 변변찮은 양복 한 벌 입어보지 못했고 생일에 케이크를 앞에 두고 가족들과 함박웃음을 짓는 일 또한 일생 없었다는 사실들이 그런 것들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여러 밤이 지나고서야, 나는 그 날 밤 눈물의 의미를 뒤늦게 헤아리게 되었다.
이제는 아빠의 생신이 가까워져 오면 둘의 힘을 모아 그럴 듯한 케이크도 넥타이도 사드리곤 한다. 유명하다는 일본 제과점의 진짜 케이크, 주눅 들지 않을 브랜드의 진짜 넥타이. 슬쩍 메고 나가면 거, 딸내미가 좋은거 사줬는갑네? 하고 누군가 물어올 정도의 물건들로 말이다.
여전히 아빠는 자식이 생일에 맞추어 사오는 선물이라면 그것의 쓸모와 가격을 떠나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기쁨을 표현해주고 있으므로 일기의 풍경에서처럼 케이크를 둘러싸고 앉아있는 그림은 큰 변동 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그 날 밤 동생의 일기를 읽었을 때 번져가던 아빠의 표정,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벅차오르던 그 표정은 아직 어떤 선물 앞에서도 본 적이 없다.
늦은 밤, 동그란 스탠드가 책상의 한 쪽을 밝히고 서있다. 웃음보다 울음이 먼저 나오게 했던 그 날의 일기가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자기 돈이라곤 가져본 적 없는 어린 딸이 아빠에게 안겨주고 싶었던 마음뿐인 선물. 나는 오늘 우리 아빠에게 맛있는 케이크를, 나는 오늘 우리 아빠에게 근사한 넥타이를……. 다시 작아지고 작아져서 그 날의 스탠드 밑에 아빠와 나란히 앉아있을 수만 있다면, 아빠를 꼭 한 번 안아주고 싶다.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