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네 번째 마음,
아빠는 길을 잘 외웠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지나갔던 동네의 골목을 우연히 다시 지나갈라치면 아, 여기 전에 거기네. 하고 반갑게 아는 체를 할 정도로. 자연스레 나에게도 아빠는 늘 그런 모습이었다. 어디든 한 번 간 길은 다 기억하는 똑똑한 우리 아빠.
며칠 전의 일이었다. 전에 맛있게 먹은 돼지갈비 집이 하나 있는데 주말에 다 같이 외식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아빠가 물어왔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신촌의 어디 골목인데 가게 이름은 잊었다고 했다. 이름을 모르면 어떡해? 하는 나의 시큰둥한 핀잔에 아빠는 이름은 몰라도 길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 문제없다고 응수해왔다. 너, 아빠 모르냐, 다 내 손바닥 안이야.
그 말을 바로 증명이라도 해 보이겠다는 듯 아빠는 곧장 스마트폰의 지도를 찾아 검색부터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거미줄 같이 촘촘했던 신촌의 골목길이 굵은 선으로 커져갔다. 간판까지도 보일 만큼이 되어서야 아빠는 자신이 내렸던 신촌역에서부터 되짚어가며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내려가지고 여기로 이렇게 걸어갔거든, 그러다 이쯤에서 꺾었다고. 아니, 여기 편의점이었던가. 어라, 잠깐만 있어봐. 여기가 아니었나, 다음 골목이었나, 어, 헷갈리네, 좀 있어봐…….
골목골목이 전부 다 비슷하게 생긴 곳인 데다 하필 또 거기가 돼지갈비 골목이라 내 눈에도 모든 가게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지도로 찾느니 차라리 가서 찾는 게 빠를 것 같아 아빠에게 그만 찾아보자고 말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빠는 들은 체도 않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그때 내려서 갔던 길을 다 기억한다니까, 금방 찾을 수 있어.
스스로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 지켜보고 있는 딸의 믿음이 더해졌기 때문인지, 아빠는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자세를 고치고 앉아 같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라기 보단 아빠의 체면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분명히 이쪽 골목이었거든, 응, 초입에 뭐 기억나는 건 없어? 편의점이 있었는데, 음, 무슨 편의점인진 기억 안 나고? 내가 여기서 내려서 이렇게 쭉 갔다고. 그래, 그래, 잘 기억해봐.
처음엔 핀잔으로 시작했지만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응원에 가까운 말을 건네게 됐다. 그런 내 대답은 듣는지 마는지 아빠는 무어라 반응도 없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에이, 다시, 다시 처음부터 봐야겠다, 편의점만 찾음 돼. 아빠, 신촌에 편의점이 한두 개야? 하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돌고 돌아온 곳은 다시 처음의 신촌역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헤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대답도 자꾸만 길어졌다. 체면을 지켜줄 수 있다면 뭐라도 좋으니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아주고 싶었다.
아빠, 봐봐, 이 지도 작년 9월 기준이래. 그새 바뀌었을 수도 있어. 에이, 그리고 이 정도 찾았으면 충분하지. 이게 화면으론 나도 잘 못 찾아. 눈으로 보는 거랑 다르다니까. 정말이야. 가서 찾으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거야. 진짜라니까.
변명이 되어주고 싶어 했던 말이었지만 어쩐지 계속 참견을 하고 있는 게 좀 쑥스러워 조금 더 지켜보다 자리를 피했다. 다시 한참 뒤에, 이쯤이면 다른 걸 하고 있겠거니 하고 슬쩍 가 본 안방에서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빠가 있었다. 조금 열린 방문의 틈 사이로 스마트폰의 환한 화면과 그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아빠의 손가락들이 보였다.
아빠는 다시, 처음의 장소에 있었다. 기억 속의 걸음을 홀로 무수히 반복하면서. 손금 같이 좁은 골목들을 뒤쫓는 아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중얼거리는 아빠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끝내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말에 문에서 조용히 손을 떼며 생각했다.
왜 어떤 말들은 기어코 혼잣말이 되는가.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