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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Sep 25. 2018

설명하지 말고 표현하세요

나의 집단상담 일기 04



혼돈의 개강 첫 주가 지났다.



   몇몇 수업은 자리가 나 줍고 몇몇 수업은 교수님께 증원을 부탁드리며 간신히 필요 학점을 채웠다. 집단상담이 있는 월요일에는 빈 가방을 들고 학교를 갔다. 교재와 노트가 따로 없는 수업이라 몸은 가벼웠지만 마음도 꼭 그렇지는 않았다. 학교를 가는 내내 오늘은 어떤 수업일지 설레면서도 긴장이 됐다.


   강의실은 저번 시간과 마찬가지로 책상을 뺀 의자들이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다. 출석을 부르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번 주에 우리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했지요. 오늘부터는 몸의 감각을 통한 감정의 알아차림을 연습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먼저 약속해야 하는 세 가지가 있어요.” 교수님께서는 칠판에 쓰는 대신 손가락 세 개를 펴셨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을 것’, 두 번째는 ‘왜곡하지 않는 이해를 할 것’, 마지막 세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설명하지 말고 표현할 것’이에요.” 잠시 틈을 둔 교수님께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않을 것'은 상담의 라포 형성 -신뢰와 공감 형성- 을 위한 기본 원칙이에요. 집단상담은 누군가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두 번째의 약속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 말하는 A는 A일 뿐, 나의 B로 왜곡하여 이해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집단원들을 위해 하는 약속이라면, 세 번째는 집단상담의 일원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에요.”



   앞서 말씀하신 것 중 평가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을 것, 이라는 두 가지는 바로 이해가 됐다. 그러나 세 번째의 나를 '설명'하지 말고 '표현'할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명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도 구분이 모호했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기를 기다렸지만 교수님께서는 바로 수업을 시작하시려는 듯 출석부를 닫으셨다.


   “그럼 저번 시간에 몸의 감각을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해볼까요. 여러분의 자기 개방이 좀 더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번 시간에는 그림 카드를 나누어 줄 거예요." 교수님의 손에 들려있던 그림 카드들이 손에서 손으로 한 장씩 넘겨졌다.


   “카드를 받으면 그에 따라 떠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하세요. 오래 생각해서 떠오르는 것이 아닌 곧바로 떠오르는 감정이어야 해요.”


   내가 받은 그림 카드는 엄마와 아이가 마주보고 서있는 그림이었다. 카드 속 엄마의 표정은 엄했고 아이의 표정은 우는 것 같기도, 화난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손에 놓인 카드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 시간에서처럼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감정을 말하기란, 그 감정이 무엇이 되었든 말을 꺼내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다. 내 감정이 뭐지? 하는 물음보다 이 상황에선 무슨 감정을 말해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곧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 제 카드는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 같은 걸 하고 있는 그림인데요. 저는 좀 내성적인 성격이어서요. 이 카드를 보니까 괜히 긴장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 말한 건 표현이 아니라 설명이에요. 다시 이야기해보세요.”

   “제가 좀 내성적이어서요. 저는...”

   “아니요. 다시 이야기하세요.”


   지난번과는 달리 교수님께 혼이 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때문인지 첫 수업에서처럼 한 사람의 반응을 시작으로 한 자연스러운 반응들이 나오지 않았다. 말한 사람뿐만 아니라 말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섣불리 말을 하지 않으려고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나까지 위축이 되면서 눈치를 살폈다. 다른 누군가가 교수님의 기준에 맞는 말을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숨을 죽이고 있으면서도 이대로 침묵이 길어져서 결국 아무도 말을 안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 아니어도 누군가 말을 할 테니 가만히 좀 있자는 생각과, 끝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서 수업의 분위기가 이대로 망해버릴 거란 걱정이 엎치락뒤치락 계속 부딪혔다. 결국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전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나왔다.  


   “저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이상하게 그림 속의 엄마에게 감정이입이 됐어요.”

   교수님께서 곧바로 말씀하셨다.

   “좋아요. 그런데 낯선 것과 별개로 ‘저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는 말은 왜 붙인 건가요?”

   “저, 저는 그냥...”

   “설명이죠. 맥락에 따른 말을 건넨 것일 뿐, 지금 한 말은 표현이 아니라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긴 설명적인 말이에요.”


   허를 찔린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잘못한 걸 들킨 것 같이 부끄러웠다가 곧 당황스럽고 무안해서 불쾌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있는데 교수님께서 말씀을 덧붙이셨다.


   “타인을 의식해서 나오는 설명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예요. 표현과 설명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만 올바른 감정의 표현이 가능해져요.”



   첫 수업과는 다르게 두 번째 수업은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로 끝이 났다.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빠져나오는데 괜한 반발심이 들었다. ‘도대체 제대로 설명해주시지도 않고 자꾸 알아차리라고만 하시면 어떡하란 거야?’ 애써 꺼낸 말마다 설명이라고 면박을 주시는 게 답답해 화가 났다. 내 딴엔 어색한 침묵을 깨보려 꺼낸 말이었는데 모든 사람들 앞에서 ‘네 말엔 다분히 의도가 있다’고 창피를 주신 교수님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 날은 수업이 끝나고서도 집단상담에서의 그 순간에 계속 머물렀다. 생각하면 할수록 창피하고, 짜증나고, 부끄럽고, 화가 났다. 쓸데없이 자꾸 떠올리니까 그런 거라고 애써 다독였다. 기분 따위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면 알아서 가라앉을 일. 혼자서 오락가락하는 감정은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마음을 추스르고 평소처럼 친구와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들었다.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사고 잔디밭에 앉아 해를 쬐었다.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까 아까보단 마음이 훨씬 편해진 듯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알아차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더 정확히는, 교수님께서 나의 말에 다시 되물으셨던 순간부터. 내 기분을 표현하게 되었던 첫 번째 순간이었다.






(다음) 모든 마음에는 이름이 있다  (9/27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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