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버금 May 07. 2019

모처럼 봄



마흔 번째 마음,

얄궂다



  작년쯤엔가. 길을 걷다가 터널을 지나가야 할 일이 있었어요. 차도만 있고 인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다른 길이 없을까 찾으려고 터널 옆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가 숨어있던 작은 카페를 발견했어요. 뭔가 나만 알고 있는 그런 장소를 찾은 것 같아서 언젠가 꼭 한 번 가야지 벼르기만 하다 그만 잊어버렸었는데 오늘 모처럼 날씨가 좋아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찾아왔어요. 볕이 쏟아지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생각했어요. 이유 없이도 문득 행복해질 수 있는, 모처럼이라는 핑계가 있어 참 다행이라고.





  글 쓰는 사람들은 뜸 들이기의 귀재들이라서 근황으로 올린 글도 한소끔 끓고 난 근황일 때가 많지만 오늘은 진짜 근황이 담긴 근황들을 몇 자 적습니다. 요즘의 저는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다니고 있어요. 숨이 차고 땀이 나는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글을 쓰면서 '혼자' 와 '오래' 와 '앉아있음' 이라는 환상의 콜라보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인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취미들이 하나씩 생기고 있어요.


  그중 달리기나 자전거는 혼자, 오래 하는 건 같은데 등산은 혼자 가도 혼자가 아닐 때가 종종 있어요. 평일의 이른 오전에 등산을 가면 보통 그 산에서는 제가 최연소가 되어서 오르는 길에는 어르신들이 말 걸어주시고 그러다 보면 정상에서 같이 김밥을 먹고 내려오고서는 같이 매점 커피도 마시거든요. 커피를 사주시겠다고 하면 아유, 아니라고, 정말 괜찮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말씀드려요. "저는 시원한 걸루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어제는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친한 친구인 그 친구는 제 글 따위는 보지 않아서 제가 요즘 글을 쓰는지 달리기를 하는지 어쩌는지를 모른 덕분에 그런 것쯤은 가뿐히 무시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눴어요.


  친구는 요새 어벤저스 스포일러가 유행이라며 얼른 보러 가자고 했고, 그때 마침 들어가 본 어플에서 정 가운데 자리가 난 걸 발견했고, 그렇게 속전속결로 영화를 보러 가게 됐어요. 사실 저는 영화를 일 년에 한 편 꼴로 볼 정도로 잘 보지 않아서 저한텐 그 맨이 그 맨이라 스포일러를 당해도 문제가 아니지만요. 그래도 모처럼 오랜만에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갈 생각을 하니 괜스레 설레어지네요.





  오래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눈물은 떨어져도 숟가락은 올라간다는 기가 막힌 대사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일상의 지독한 얄궂음을 표현하는데 그에 견줄 수 있는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싶어요. 슬픈 책을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 ㅋㅋㅋ를 치지만 사실은 무표정이고, 못 하겠다고 하면서도 또 쓰고 앉아있는 것처럼. 정의할 수 없는 얄궂은 모습이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런 얄궂음이야말로 일상을 일상로 살게 해 주는, 유연한 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의 저는 글을 쓰거나, 잘 쓰거나 못 쓰거나 혹은 안 쓰거나, 주말에는 도예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언젠가 이 곳에서 내 책을 내가 파는 모습을 생각을 하면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와요.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오월의 볕 아래 봄이 지천인 오늘, 모처럼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 말글 그리고 사진  your_dictionary_ 

매거진의 이전글 진심이 진심에게 하는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