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탐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현주 Oct 18. 2020

영화 <클로저>

영화 <클로저>는 두 커플(네 명의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그리고 있다. 오래된 연인의 권태를, 시작하는 사랑의 열정을, 금지된 사랑의 달콤함을, 조건적 사랑의 위선을, 그리고 무엇보다 끝난 사랑의 허망함을. 고작 네 명의 배우만의 변주로 관객에 진한 감동을 주는 이 작품은 많은 여배우들에게 ‘앨리스’라는 캐릭터를 한 번쯤은 연기해 보고 싶은 인생 배역으로 꼽게 만들었다.

영화는 댄(주드 로 분)과 앨리스(나탈리 포트만 분)이 행인들 속에서 각자 따로 걷는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행인 #34, #35 쯤 되는 미약한 비중을 가진 그들이 무려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고’가 필요하다. 마치, 현실의 사랑에도 사고가 필요한 것처럼.

앨리스는 미국에서 무작정 영국으로 온 자유로운 영혼의 댄서다. 영국 교통 시스템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그녀가 횡단보도의 왼쪽 편만을 보고 걷다가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는데, 하필이면 영국에서 최고 미남인 주드 로가 연기를 한 댄이(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자리에 있다. 그는 황급히 넘어져 있는 그녀에게 달려간다. 길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데도 심하게 아름다운 앨리스. 사고로 정신이 없을 그 와중에도 특유의 잔망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머금은 채 이런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린다.

“안녕, 낯선 사람.”

그 때부터 이 둘은 사랑에 빠진 것에 틀림없다. 너무나 강력하고, 도무지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의 문장, “Hello, stranger.” 그 대사는 영화광들 사이에서 한동안 유행처럼 번져 나갔고, 심지어는 그 문장 하나로 술자리에서는 몇 시간이고 내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낯선 사람일 뿐이었던 행인 #34, #35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서로의 존재가 상대의 삶 속에 들어가는 ‘사고’를 겪게 된 둘은 더 이상 영화의 주변부에 속한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이 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마침내 그들은 영화의 중심부로 파고들어 자신의 존재를 포효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음!’이 상대를 통해 실현되는 감격스러운 순간. 현실의 사랑과 얼마나 비슷한가.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면모는 그 모든 아름다운 순간을 단지 10분 남짓한 신으로 뭉게 버리고 질척이는 감정의 잔여물 속으로 곧장 뛰어 들어간다는 데에 있다. 그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름다운 커플인지는 ‘3년을 함께했다’는 공허한 말로 압축될 뿐, 댄은 곧 새로운 자극을 만나게 될 터였다.


자신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른 댄은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를 만난다. 물론 안나는 앨리스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 독립적인 그녀의 모습은 댄에게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되었고 그 둘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남겨진 앨리스는 댄을 그에게서 떠나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물론 안나에게도 래리라는 애인이 있었다. 그는 능력 있는 의사로 안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하지만 그가 주는 경제적 안정감을 제외하고는 무엇인가 늘 부족한 느낌이다. 댄은 그와는 다르다. 화려한 명성과 아름다운 외모, 어딘가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으로 안나의 사랑을 갈구한다. 래리 대신, 댄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게다가 주드 로니까..)


앨리스와 댄, 안나와 래리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클로저>의 원 창작자인 패트릭 마버는 매우 무심하다. 마찬가지로 댄과 안나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했는지에도 잔인하도록 차가운 시선을 유지한다. 작가는 사랑의 충만함 보다는 그 후의 왜소함에 주목한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의 사디즘적인 현실적인 면에 환호를 하는 것이고.

어쨌든 이런 작가에게서 탄생한 인물들이니 댄과 안나의 관계도 역시 삐걱거리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 그놈의 돈 때문이다. 작가로서 반짝 명성을 얻었던 댄은 무슨 이유인지 추락하고 만다. 안나에게 돈을 벌 수 없는 무능력한 댄은 더 이상 매력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래리,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말해서 돈 잘 버는 래리에게 돌아가버린다. 그리고 상처입고 버려진 댄이 선택한 곳은?

그렇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앨리스의 품이다.


영화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댄과 앨리스가 사랑을 나누는가 하면, 순식간에 이별을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가 하면 재회를 하여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갑작스러운 전개 방식을 취한다. 작가는 최대한 군더더기를 빼고 현실을 간파하는 몇 몇의 대사와 장면만으로 보여주기 방식을 택한다. 이렇듯 작품의 곳곳에는 설명되지 않은 많은 빈 공간들이 있다. 그 빈 공간들 속에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더하며 우리는 그 영화에 대해 말한다.

때문에 영화 <클로저>는 모처럼 맥주 한잔을 놓고 밤을 지새우며 논하기에 참 좋은 작품이 되었다. 그 속에는 다른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 바닥의 저열한 나의 모습이 있고 당신의 나약함이 있다. 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는 사랑에 취약한 나를 대면하며, 그렇게 성장한다.


-에필로그-

한 영화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랑은 낯선 사람들이 만나 가장 내밀한 비밀을 나누다, 다시 낯선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렌스, 애니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