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들은 죽어서도 골칫덩이였다”
쓰는 행위는 결국 정치적이어야 한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시할 수 있는 성숙함이 담길 때, 비로소 글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이어 콜슨 화이트헤드의 ‘니클의 소년들’을 연달아 읽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두 텍스트가 내게 다가와 삶의 문맥을 이뤘고 나는 더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폭력과 착취, 고통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늘 힘겹다. ‘이제 우리는 고난을 기반한 지금의 풍요롭고 행복한 시대에 있으니 감사해야 한다’라는 식의 저차원적 교훈을 주고 계몽을 하려는 의도가 아닌 탓이다. 여전히 억압이 존재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 사실을 대면할 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 아니 그럴 용기가 없다는 비겁함이 나의 본질이라는 것만 같아 부끄러워질 뿐이다.
‘니클의 소년들’은 미국의 1960년대 소년 감화원 ‘니클’에 대한 이야기를 엘우드라는 흑인 소년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인종분리정책이 막 철폐되었지만 미국 전역에는 여전히 KKK와 백인우월주의가 팽배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엘우드는 가난에 찌든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인간다움,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물론 이런 숭고한 열망과 인내가 주인공을 시련에 빠트린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들으며 흑인 운동에 동참한 이유로 소년 감화원 ‘니클’에 보내진 것이다.
물론 ‘니클’에는 백인 소년들도, 흑인 소년들도 있었다. 다만 이 둘의 분리가 확실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열악한 환경과 잔인한 폭력 속에서 흑인 소년들은 사회 부적응 자면서 동시에 순응자가 되어갔다. 그럼에도 엘우드가 끝까지 신념을 놓지 않은 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덕분이었다. 끊임없는 인내와 고통에 대한 견딤으로 그들을 지치게 할 것이라는, 어떤 시련 속에서도 그렇고 그런 깜둥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를 존재하게 했다.
작품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이 종종 등장한다. 엘우드에게 깨달음을 주는 구조가 세련되다고 볼 순 없지만 언제나 큰 감동을 주는 포인트였다.
그럼에도 2020년의 퓰리처 상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작품이 다소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대적 상황이라는 맥락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소설 자체만으로 봤을 때 익숙한 내러티브다. 숭고한 소년의 핍박, 그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존엄함은 루이스 새커의 ‘구덩이(Holes)’에서도 이미 접하지 않았나. 게다가 작가가 엘우드를 영웅화하는 방식도 여전히 청교도적인 사고의 잔재로 비친다. 근면한 엘우드, 촉망받던 엘우드, 인격적인 엘우드. 그런 엘우드가 흑인 운동을 하다 잡혀간다는 것에 동요하지 않을 독자가 어디 있을까. 소년의 꿈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메마른 감성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내가 더 관심 있는 것은, 숭고하지 않아도 똑똑하지 않아도 발 벗고 나서는 흑인들의 용기다. 수려한 지성의 말이 아니라 화려한 논리가 아니라 투박하고 거친 언어가 늘 나를 더 움직인다. 엘우드가 부지런한 인재기 때문에 그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서사가 아니라 엘우드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숭고한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하는 서사이길 바라는 마음이다(아 물론, 작은 개인의 서사에 더 힘을 실었던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난 직후 이기 때문에 그런 욕심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다).
인종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미국의 현 상황이 국내 서점가에도 작용하고 있다. ‘니클의 소년들’이니 트레버 노아의 ‘태어난 게 범죄’ 같은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메인 매대에 진열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종 간의 갈등에 대한 담론이 벌어지는 한국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피부색과 같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차별에 대해서, 혹은 오롯이 타인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나 열성적이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어째서 우리 안에 있는 차별은 보지 못하는가. 중국인에 대한 발언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월감, 다문화 가정에 대한 멸시. 마치 다른 일처럼 느껴지는가. 타인의 고통을 보며 나르시시즘과 우월감에 빠진 자위를 하고 있는가.
미국이라는 천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브먼트가 우리에게 스펙터클로만 소비되고 있는 것 같아 ‘니클의 소년들’이나 ‘태어난 게 범죄’ 같은 작품이 이제야 서점에 진열되는 것도 조금 속 시끄럽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읽어보는 나도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