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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Nov 29. 2017

로렌스, 애니웨이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자비에 돌란은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스크린 위에 자신의 생각을 현실적으로 풀어간다.


우리는 종종 가장 성스러운 사랑을 본질에 대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그런 순수한 사랑을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 혹여 누군가 그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다면 어린 생각이라고 조소할 뿐이다. 더구나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사랑에 대한 충성심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물질이든, 연락 빈도로든, 뭐로든.


우리를 보라. 우리는 사랑을 '준다'.(하사한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러 이러하기 때문에.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그의 능력이 될수도 있고, 한때 열렬했던 나를 향한 구애에 대한 추억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비관적이게는, 본질의 중요성을 부르짖던 이들마저 큰 깨달음을 얻고 결국에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종종 본다는 것이다. 까다롭게 굴던 언니가 '도대체 왜'라는 물음표를 주는 사람을 만나 3개월만에 결혼 하는 것을 보고 문득, 나 또한 제도의 힘에 밀려 주변의 시선에 굴복해 버릴 것인가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참에 이 영화를 보다니, 참으로 우연의 장난이란.

로렌스와 프레드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다. 로렌스의 예술적 성향과 약간은 오드한 프레드는 서로에게 정말 잘 맞는 짝이라고 느끼며 행복한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로렌스가 서른 다섯살이 되는 날 새차장에서, 아니, 정확히는 새차장 기계속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백하면서 그 둘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여자로 살고 싶다.


이윽고 새차장 문이 열리고 그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마치 새차 물로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를 씻어 낸 듯하다 (자비에돌란은 종종 이런 명백한 설정을 통해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한다, 유치하지만 귀엽기도 하고 본인도 이 점은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 같은 여성팬을 위해서!)


프레드는 엄청난 커밍아웃에 힘들지만, 그를 지지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1989년의 퀘벡은 여장을 하고 다니는 로렌스를 인정하지 못했다. 어딜가나 그를 조롱하는 시선에 맞서야 했고 때로는 무시를 해야했고, 때로는 시비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 몫은 로렌스 혼자가 아니라 프레드에게도 고스란히 짊어졌다. 결국 그들은 현실의 혹독함에 헤어짐을 결심한다.


5년 뒤, 여장남자로서의 가장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로렌스와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프레드가 등장한다. 둘 중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로렌스는 프레드를 추억하며 쓴 시집을 프레드의 집으로 보내고 동요를 느낀 프레드는 그와의 밀월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이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며 전진할 뿐이었다. 결국 같은 문제로 그들은 헤어짐을 선택한다.


영화를 통해 자비에 돌란은 "너라면 어떻겠어?"라고 묻는다. 그리고 관객은 프레드의 결정에 어느 정도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캐릭터들의 심정이 너무 이해가 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라면, 내가 프레드였다면. 난 좀 미련해서 그냥 로렌스 곁에 있었을 것 같다.

로렌스는 프레드를 원했으니까. 그가 원하는 데로 해주고 싶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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