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성공하였는가
2017년 3월, 200만이 넘는 촛불 행렬로 혁명을 이룩했다. 비록 가슴 아픈 사건 위에 기반한 결실이었지만 우리는 다시 젊음을 느꼈고, 아직은 꺼지지 않은 정의를 느꼈고, 승리에 도취했다.
곧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얇은 희망의 장막으로 따듯한 하루 하루였다. 경쟁으로만 내몰던 매정함이 조금 누구러지지 않을까. 조금 더 높아진 취업률과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간의 공정함과 더이상 불안하지 않음이 이번 정부에서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얼핏 봤던 '아메리카노 산책'이라는 헤드라인의 한 신문 기사가 이를 증명해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이 커피를 쥔 채 고위 비서관들과 함께 초록의 산책 길 속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함께 실려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편안한 표정으로 웃는다. 나도 모르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그리고 그 편안함을 믿고 싶었다.
황정은의 연작소설인 <디디의 우산>은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중편의 소설로 이루어져있다. '혁명'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1. d
d는 연인 dd를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된다. 집안 곳곳, 그녀의 사물들은 여전히 온기를 가지고 있고 d는 이를 참을 수 없다. 그녀와 함께 살던 반지하 방을 떠나 방음조차 되지 않는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긴 d. 그리고 그는 '세운 상가'의 택배 기사가 된다. 물론 무의미한 일이다. 그는 살고 있지만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세운 상가에 여소녀라는 남자가 몇 십년 째 스피커와 앰프를 수리하는 일을 한다. 그의 동료들은 하나 둘 떠났고 남은 자들이라곤 여소녀 외에 손에 꼽을 만큼. '재생'이라는 키워드로 그 해 서울 시장이 된 자가 세운 상가를 살리겠다고 했지만 여소녀는 이를 믿지 않는다. 이런 그에게 한 젊은이가 신기하게 보인다. 생기라곤 전혀 없고 매번 데면 데면하게 굴어 며칠 하다 그만 두겠지 했던 신참 택배 기사가 꽤 오랜 기간 버티는 것이다. 여소녀는 그에게 말을 건다. '어이, 나 알지?'
이렇게 시작한 그들의 다소 어색한 만남의 연결고리가 d에게 다시한번 세상에 나오는 징검다리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광화문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2.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것들은 너무도 당연하여 말할 필요가 없다. 이를 테면 '묵자' 같은 것. 그러니까 '점자'는 맹인들을 위한 글자 체계이다. 비맹인을 위한 글자체계가 바로 '묵자'인데,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너무 당연하여 그 개념이 필요한지 조자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 이 사회에 드리운 조용한 폭력이 '정상성'이라는 개념 하에 묵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자 '나'의 생각이 96년도 연세대학교 포위 사건, 외면하는 대중들, 그 안에서 운동권 학생들의 모순과 성에 대한 탄압, 젠더문제, 동성애, 그리고 2016년부터 2017년에 이른 촛불 행렬의 긴긴 기간의 이야기를 통해 섬세히 그리고 날카롭게 담고 있다.
'나'는 서수경과 20년 째 동거 중이다. 그들 사이에 형성된 오랜 시간의 공감과 편안함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지만 이를 보는 세상의 눈이 곱지 않다. 자꾸, 규정하려 한다.
이런 '나'에게 촛불 시위에서 '악녀 OUT'이라는 피켓을 든 남자가 거슬리고, '언니, 이제 그만하면 안될까'라고 말하는 김소리가 비열하게 느껴진다. 이정미 재판관의 마지막 판결문이 낭독된다. '아무도 말하지 않'은채 작품은 끝이 난다.
과연 혁명은 성공했는가. 'd'는 혁명을 시작하며 서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혁명이 성공으로 끝이나면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여전히 찝찝함이 나의 뒷통수를 잡아당긴다. 작가가 남겨놓은 더 많은 단서들을 찾기 위해, 이게 단순히 낭만적인 혁명의 성공을 그린 이야기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의 반복이다. 이에 먹먹함을 느낀다.
다음은 두번째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다. '나'와 서수경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침대와 각자의 방이 있다. 대화나 포옹이 필요할 때 혹은 그저 서로를 봐야 할 때 우리는 서로의 방으로 건너가고, 잠들기 전까지 같은 침대에 누워 대화하다가 그대로 잠들거나 잠들기 직전에 각자의 침대로 돌아간다. 같이 잘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우리는 서로의 사물과 습관과 기척에 익숙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서로를 깨우는 아침, 각자의 일터에서 떨어져 지내는 오후에 주고받는 안부, 피곤한 귀갓길 끝에 만나는 평일의 환영과 늦잠에서 깨어나 점심이나 저녁을 천천히 만들어 먹는 주말,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지만...(중략)
우리가 무슨 관계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를 마중 가는 사람, 20년째 서로의 귀가를 열렬히 반기는 사람, 나머지 한 사람이 더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순간을 매일 상상하는 사람, 서로의 죽음을 가장 근거리에서 감당하기로 약속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