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현지 Mar 15. 2020

현지독립만세

고민보다 Go !

'독립해서 신세계를 경험하세요.'라는 동료들의 부추김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엄마가 사준 옷장, 엄마가 깔아준 이불. 엄마가 세탁해서 개어놓은 내 옷. 나름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내 삶은 엄마의 희생으로만 이루어졌을 뿐, 사실 집과 관련해서는 취향과 역할이 1도 없이 살아왔다는 깨달음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성격 검사를 하면 매번 빠지지 않고 추진력, 실행력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다. 대한민국에 드문 유형이라 다행이라는 ENTJ형 인간.

인간 불도저 같은 성정에 걸맞게, 독립을 마음먹은 날부터 부동산 어플에 올라와있는 매물을 쥐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2시간씩 쪽잠을 자며 찾아도 시원찮길래, 그 다음 날에는 휴가를 냈다.


마음에 드는 매물을 찾는 여정은 팽팽하지만 딱히 긴장감은 안 드는 업무의 연장선 같았다.



"문의하신 그 방요? 어젯밤 얘기하실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좀 전에 계약이 되었다고 하지 뭐예요. 비슷한 스펙으로 딴 방 보여드릴게요."

ㅡ지금 아침 9시인데 누가 먼저 보고 계약을 해요.


"이 매물 4층으로 보고 오셨어요? 2층인데. 오타가 있었나 보네요. 그래도 2층이 얼마나 좋은데요. 전혀 안위험해요. 요즘 도어락도 맘먹으면 풀 수 있어서 낮은 층이라고 더 위험하고 말 것도 없어요."

ㅡ아...? 네... 그러세요.


"창문이 대각선으로 달려있긴 한데, 땅이 오각형이라 그래요. 이 건물이 모서리에 있잖아요. 구조가 특이한 게 아니에요."

ㅡ뭐가 다르죠?


집도 인연이 있어서 '내 집이다.' 느낌이 온다는 말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이 말을 믿었지만 허위 매물에  연거푸 배신을 당하다 보니, "내가 연애도 그런 말을 믿고 살아왔었는데 아니었다고 짜샤!" 인생사 전반으로 의구심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정신건강을 위해 이번 주는 이쯤에서 후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털린 멘탈을 재정비해서 다음 주는 더 열심히 공략하는 거야! 스스로를 위안하며 오늘 보려던 마지막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만났다. 딱 이것이다 싶은 집. 내 운명.


사람을 워낙 좋아해 지인들을 다 초대할 것이라는 로망으로 거실이 크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반드시 햇빛이 잘 드는 곳이어야 하며, 엘리베이터가 현대고 샷시는 한국산이어야 한다는 마이크로 디테일까지 부합하는 곳. 무엇보다 안목 보증수표인 엄마가 "여기라면 안심할 수 있겠다." 단번에 얘기할 만큼 환경이 좋은 학교 앞의 집이었다.


이 집을 선택하고 가계약금을 입금하기 전,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과 내가 살게 될 집이 얼마나 가까운지 거리를 재보는 것으로 최종 확인을 끝냈다. 교통편이 어떻게 되는지, 도보로 오면 얼마 정도 걸리는지, 맛있는 것을 대접할 배민 맛집이 근처에 있는지. (마지막 줄은 직업병이라 할지라도) 조건이 나쁘지 않군!


계약 날짜까지 잡고 돌이켜보니 고민부터 실행까지 만 3일이 걸렸다. 당장 쫓겨 내몰리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빠르게 결정했냐고 누군가가 물을 수도 있다.


아웃풋이 고민의 시간에 반드시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회는 오는 즉시 바로 잡아야 한다. 혹시 모를 가능성을 위해 최선의 순간을 놓치는 과오는 저지르지 않기로 한다. 1천 번을 본다한들 가장 처음에 봤던 1번이 베스트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집을 택했다.


곧 '어른의 일' 책을 펴내실 어른 선배 손콩콩


기존 세입자가 5월에 이사 예정이라 입주까지는 약 두 달이란 시간이 남았다.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지 고민도 해야 하고, 공과금과 대출이자도 계산하고- 인생에 해본 적 없던 고민을 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제법 잘 큰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은행의 노예라는 불가피한 숙명은 차치하더라도, 이 공간에 초대하고 싶은 지인들까지 가득하니 별게 다 잘 자란 기분이다.


이제 그다음 투두로 넘어가 볼까.

매거진의 이전글 집착의 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