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일상
30대까지의 나는 가히 '시작의 달인'이라고 부를만 했다. 뒷일이야 어찌되었든 일단 시작부터 하고보는 일이 많았다. 육아휴직중이던 어느 날 갑자기 필이 꽂혀 낙서를 끄적여 인스타툰을 연재하기 시작해 두달여간 300명정도의 팔로워를 만들어냈을 때의 뿌듯함... 그러나 그런 뿌듯함이 무색하게 다른 관심사가 생기면 그쪽에 다시 올인하면서 아예 내려놓는다. 그 때 당시엔 가족의 캐나다 1년살이였다. 인스타툰은 그래도 애착이 있어서 캐나다가서도 2~3편을 그려서 올리긴 했으나 캐나다에서 열심히 사느라고 시들해지고, 계정에 로그인조차 안한지 오래되었다.
생각해보면 매년 그렇게 뭔가를 새롭게 시작했다. 역순으로 매년 이슈를 적어보니 나의 시작 리스트가 곧 내 일상의 개척이구나.
15년엔 복직후 적응 및 회사에서 성과인정 (최상위고과..)
16년엔 이직시도 시작 및 이직성공 (지방 -> 서울로)
17년엔 이직적응완료 및 회사에서 성과인정 (최우수사원상 같은거 받음)
18년엔 이직시도 시작 및 이직성공 (사기업 -> 공기업)
19년엔 이직 후 적응하다가 둘째임신으로 임산부의 삶 시작
20년엔 애기 키우며 인스타툰 시작 (10월부터 약 3개월가량 불태움)
21년엔 캐나다살이 시작 (3월부터 1년)
22년엔 귀국후 적응 및 친구들과 다이어트단톡방 시작해서 식단조절과 운동 등 시작 (5월부터 현재까지)
문제는.. 내 시도들이 대부분 이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직이나 긴 여행처럼 시작과 완결이 분명한 경우를 제외하고. 루틴을 쌓아올려 성공의 길에 올려놓는데는 매번 실패했다. 저기 적은 것 외에 매년 매순간 수없이 반복했던 시작이 '브런치에 글 쓰기' 였다. 어떤 주제나 목차를 가지고 규칙적으로 글을 쓰자는 목표를 수도없이 세운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매번 지저분한 글 목록들을 싹 갈아엎고 다시 처음부터 쓴다. 그러나 여전히. 몇년째. 나의 브런치통은 잠잠하고, 구독자 수도 제자리다.
사실 글 쓰는게 어렵진 않은데, 젊은 시절 썼던 것들과 달리 30대 이후로 쓰는 글들은 많이 읽혀지지 않는다. 그 전에는 채널 메인에 오르거나, 팬이 생기거나 하는 일들이 많아서 계속 동기부여가 되었는데. 브런치에서는 내 글이 노출되지 않는다. 재미가 없어서 이기도 할 것 같고, 그 전처럼 솔직하게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은 브런치에서 (내가 주로 쓰는) '일기처럼 감성적으로 쓰는 글' 보단 자신에게 유용하고 도움되는 글을 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부터도 브런치북을 볼 때 목차부터 본다. 이곳은 목차가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나처럼 시작부터 일단 쓰고보는 사람의 앞날은 불투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잊을만하면 브런치 채널에 들어와 본다. 예전에 그나마 내가 글이라는 걸 끄적이던 플랫폼 - 페이스북,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블로그, 이글루 블로그 더 이전에는 싸이월드 등등.. 누군가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와서 댓글을 달아주거나 서로 소통하던 채널들은 몽땅 망했다. 채널이 망했다기 보단 어떤 SNS의 흥망성쇠를 거치며 글을 쓰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공간이 되었다. 브런치는 그런 흥망성쇠 속에서도 '글쓰는 사람 - 작가들의 플랫폼'로 이미지메이킹을 잘 하고 있어서. 글쓰고 글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그런 척 하면서 글을 쓰러 온다.
벌써 10월인데, 올해는 뭘 시작했나 돌이켜보니 한심하다. 40대가 되어서 일까? 갈수록 시작이 어렵다. 문득 전 직장의 똘똘하던 후배가 스타트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이름을 검색해본다. 그 아이는 교직원으로 이직을 했다가, 퇴사를 하고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창업을 했다) 실버타운 CEO를 꿈꾸면서, 3년내에 해당 업계에서 최고의 스타트업이 되겠다는 그 애의 각오와 차곡차곡 매일매일 쌓아올린 콘텐츠들을 보면서... 조금 마음이 동했다. 나도 시작할 수 있는데. 뭔가 만들어 낼 수 있을텐데. 시작해서 꾸준히 쌓아올린다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텐데. 다시 이렇게 시작병이 찾아왔으니 뭐라도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남편이 지나가듯 얘기한 버섯재배사 태양광 사업을 찾아보다가. 지난 정부 실정으로 비리 조사가 삼엄하다는 기사를 보며 그냥 싹 접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건 뭘까. 뭘 쓰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