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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솔티 May 05. 2023

실용 스페인어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스페인어로 스페인 남성 꼬시기 

장거리 비행을 자주 다닌 내게는 지루한 비행 시간을 견디는 별 거 아닌 방법들이 있다. 


01 

탑승 전 맥주 한 잔, 탑승 후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마신다.     

맥주 2잔 화이트와인 3잔이면 기분 좋게 잠들기에 충분하다. 


02

공항 서점에서 두꺼운 스도쿠 책 한권을 사서 비행 중 모조리 풀어버린다. 

착륙 후 다 푼 스도쿠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더욱 좋다.


03

스도쿠에 집중이 안되면 틈틈히 기내 테트리스 게임을 하고 신기록을 세운다.


04 

한곡반복으로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외운다. (가사는 미리 읽지 않는 것이 좋다.)


05 

그 나라 언어 기본 회화 책을 가져가 공부한다.


위의 5가지를 하다보면 어느새 그 곳이 어디든 도착 할 수 있다.



어느 11월, 스페인으로 떠나던 새벽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 스도쿠 책과 스페인어 회화책을 사고, 게이트 앞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며 스도쿠 책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다 부랴부랴 비행기를 탔는데 아뿔싸. 스페인어 회화책을 식당에 두고온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재빨리 네이버에 재빨리 실용 스페인어를 검색했다. 내가 검색을 하면서 기대한 [실용 스페인어]는 “얼마에요?”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어디에요” “감사합니다” 등 정말 여행객이 쓸만한 실용적인 문장들을 적어둔 블로그 글이었다.


그러나 내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쓸만한 블로그 글이 아닌 “실용 스페인어” 라는 노래였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가수라고 하던데, 저는 그 가수를 아는 사람에 속하지 못했었습니다.)


아! 이거 초등학교 영어시간에 배웠던 헬로 안녕! 땡큐 감사해요 ! 이렇게 반복적으로 알려주는 노래인가? 싶어서 노래를 다운 받았다. 한 곡 반복으로 들으면서 장거리 비행을 견딘다면 제법 실용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륙 후, 스도쿠 책을 다시 꺼내 풀기 시작했고, 다운 받은 노래를 재생했다. 


그리고 “has besado con tu novio en la playa alguna vez?” 스페인어 알못이 들어도 수상한 발음으로 노래가 시작었다. 그리고 “너는 남자친구와 해변에서 키스를 한 적이 있니?” 라는 해석이 이어졌다. 


그런 방식으로 이 노래는 

si, he besado con mis novios en la playa muchas veces.

(응, 나는 내 남자친구들과 해변에서 수없이 많은 키스를 했어.)

te has enamorado de una vista alguna vez?

(너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니?)

siempre me he enamorado de una vista.

(나는 언제나 첫눈에 사랑에 빠져)


라는 몇줄 안되는 가사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8문장의 가사가 반복되고, 내가 가진 노래는 그것 뿐이고, 이 요상한 노래 때문에 스도쿠에 집중은 안되고 “저기요? 굿모닝이랑 땡큐는 스페인어로 뭐냐구요 익스큐즈미는 뭐냐구요!” 다시 찾아물어 볼 기회도 없이 비행기는 이미 날고있었다.


13시간의 비행 동안 나는 정말 1분도 쉬지않고 이 노래를 들었다. 스도쿠를 풀면서도, 테트리스를 하면서도, 와인을 때려 부으면서도, 잘 때도, 기내식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다 푼 스도쿠 책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그제서야 이어폰을 뺐다. 노래 하나를 정말 완벽하고 기가 막히게 외웠다. (라고 쓰였지만 고문에 가까운 세뇌라고 읽어도 좋다)


그렇게 도착한 스페인. 유명한 타파스 맛집은 문이 닫혀있어 그 옆집에 들어갔다가 비유명 존맛 타파스집을 발견하고, 프라도 미술관에 두 번 방문해 고야의 전시를 보고, 새로 산 카메라 렌즈 덮개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려 잃어버리고, 아침에는 화이트 와인을 먹어야 한다는 배 나온 스페인 아저씨의 말을 들었다가 모닝알콜 문화에 빠지게 되었다. 가우디의 세상에 빠졌다가, 플라멩코에 빠졌다가, 타파스와 빠에야에 빠졌었고. 단 며칠 만에 맥주는 beer가 아니라 세르베차 라고 말해야 돼! 를 주장하게 된 날들을 보내다가, 그곳에 사는 언니와 함께 그라나다의 어느 작은 펍에 방문하게 되었다. 


그라나다에서 오래 살았던 C언니는 여행객들이 가는 펍이 아닌 자기가 친구들과 자주 가던 곳에 데려가주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나, C언니, C언니의 남자친구, 그의 친구들까지 다같이 모여 그들의 단골 펍에 가게 되었다. 그런 술자리에 빠지면 서운한 나지만, 솔직히 그날은 여행 피로에 조금 지쳐 잠이나 자고 싶었던 상태였다. “내 남친 친구들 잘생겼어!” 라고 말하는 언니의 말도 조금도 솔깃하지 않았다. (아 물론 실제로 보니까 친구들이 정말 잘생기긴 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펍은, 입구 바로 왼쪽에 긴 바 테이블이 자리 하고있고, 가라오케 형식의 무대가 있었으나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Mark Ronson의 Uptown funk가 나오고 있었던 그냥 아주 평범한 작고 신나는 펍. 오후 열시가 겨우 넘은 이른 시간에도 잔뜩 취한 사람들이 그 노래에 맞춰 원을 그리며 뛰고 있었다. 별로 그 틈바구니에 끼고싶지 않았다. 


“언니 나 좀 어지러워서 그런데 저기 앉아서 맥주 한잔만 먹고 낄게! 놀고있어!” 라고 말하고 바 테이블로 향했는데 나는 뛰어놀던 취객들 보다 충격적인 미친놈을 발견했다. 귀가 찢어지게 노래가 나오고 있는 이곳의 바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 저 컨셉충은 뭐야?, 이게 스페인 남자들이 하는 고도의 심리전 같은건가? 낮에는 여기가 책읽는 분위기인가? 쟤 진짜로 읽고있기는 한거야? 속으로 그를 조금 비웃으며 대체 무슨 컨셉인지 감이 안잡히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의 책장이 정말 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가 대체 무슨 컨셉인지가 궁금했다.


“Uno cerveza por favor” (맥주 한 잔 주세요) 라고 나름 자신있게 말한 뒤, 맥주를 마시며 언니 한 번, 그 남자 한번, 언니 한 번, 다시 그 남자 한 번 번갈아 훔쳐보았다. Korea? North? South? 라고 묻는 바텐더에게 사우스에서 왔다고 답변 해주고, 또 그 남자 한번, 언니 한번씩 쳐다보는데 이 남자. 컨셉충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책장도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었다. 이 남자 귀에만 시끄러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소리를 꽥꽥 지를 때에도 그는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책만 보고 있었다. 두꺼워 보이는데 소설 책일까? 나는 그가 컨셉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나니 그의 컨셉이 아닌 대체 그 책은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잘 썼길래 저렇게 집중하지? 내 글도 저렇게 집중해서 읽게 되는 글일까? 하며 멍해지고 있던 그때.


“Why are you looking at me? Is something wrong?” 

해석: 왜 자꾸 나 쳐다봐?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이고야 죄송합니다.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면 안되는 데.나의 무례함에 부끄러워하며, 그에게 사과를 했다.


- 아래의 대화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편의를 위해 한국어로 적겠습니다.-


솔티 뻬르돈(미안), 나 너 책 보고있었어! 

 아하! &!$S1i4y91!@ (스페인어로 무어라 말하는 그)

솔티 나 스페인어 몰라! 뭐라고 말한거야? 그나저나 왜 여기서 책을 읽는거야?

 나 이 펍을 좋아하거든, 여기 낮에는 햇빛도 들어오고 조용하고 예뻐 지금처럼 시끄럽지 않아

솔티 몰랐네 나 이 동네에 3일 전에 왔거든 

 그래? 그럼 너 여기에 낮에 꼭 다시 와봐야 돼

솔티 알겠어 시간이 된다면 다시 올게. 그나저나 너 무슨 책 읽는거야? 뭐에 대한 책이야?

 이거 소설인데 가족들의 재결합(Family Reunion)에 대한 이야기야 

솔티 진지하겠네? 재밌어?

 Nah… 이건 재밌는 얘기 아니야. 슬픈 얘기거든.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고 슬픈 이야기라며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는 그의 손은 정말 크고 두꺼웠다. 

나와 다르게 밝고 파란 그의 눈동자 색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저 눈으로 그렇게 열심히 읽었단 말이지. 

그는 내게 맥주 한잔을 더 먹겠냐고 물었다. 그러겠다고 답하자 그는 내게 데킬라와 맥주를 시켜주었다. 그도 나와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우리는 데킬라와 맥주를 마셨다.


그는 내게 이름이 뭐야, 스페인에는 언제왔어, 그라나다에는 언제왔어, 누구랑 왔어, 마드리드는 어땠어 같은 질문들을 했고, 나는 그에게 오늘이 열흘 째야, 그라나다에는 3일 전에 왔어, 이 동네 너무 좋더라 알함브라에 반했어, 내가 찍은 사진들이야 예쁘지? 난 혼자 왔어 근데 저기 내 친구 있어, 뛰어 노는 애가 내 친구야, 마드리드는 좋았지만 난 그라나다가 훨씬 더 좋아 대답했다. 


그는 내게 영어를 잘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너도 잘하네! 라고 말했다. 그는 재밌지 않고 슬픈 책이야 라고 말할 때처럼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으며 “영어는 잘 못하고 스페인어가 더 편하지! 너 스페인어 할 줄 알아?” 라고 물었다.


사실 나는 데킬라를 들이키던 순간부터 나는 그가 크고 두꺼운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게 아니라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보고있는지 너무 잘 보이는 그 밝은 눈으로 책이 아니라 나를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페인에 도착해 부랴부랴 공부한 내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숫자 1부터 10 Uno, dos, tres.. 좋은 아침이에요! Buenos dias 감사합니다 Gracias, 실례합니다 Perdon, 맥주 Cerveza 와 같은 너무 실용적이기만 한 말들 뿐이었고 그나마 할줄 아는 영어 또한 어줍잖은 실력이었다. 이런 어설픔으로 그를 꼬실 수는 없을 거 아냐! 망했어! 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스페인어 할줄 아냐는 그의 그 평범한 질문이 포기했던 마음을 일으켰다.

내겐 13시간 동안 갈고닦은 비장의 실용 스페인어가 있었다. 

아 세상에! 이래서 실용 스페인어였던 걸까?


솔티 나 스페인어 못해 우노 도스 트레스,, 그라시아스, 부에노스 디아즈, 근데 나 스페인어 노래 하나 알아

 오 무슨 노래? 스페인 노래?

솔티 스페니쉬 가사인데, 한국 사람이 만들고 한국 사람이 불렀어 너는 모를거야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는 않아 그래? 무슨 노래인데? 

솔티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has besado con tu novio en la playa alguna vez? 

si, he besado con mis novios en la playa muchas veces.

te has enamorado de una vista alguna vez?

siempre me he enamorado de una vista.


한국어 가사 없이 스페인어 부분들만 그에게 노래하며 내가 아는 스페인어를 알려주었다. 

“너는 남자친구와 해변에서 키스를 한 적이 있니?” 

“응, 나는 내 남자친구들과 해변에서 수없이 많은 키스를 했어.”

“너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니?”

“나는 언제나 첫눈에 사랑에 빠져” 


처음 보는 남자에게 더듬거리며 저런 말을 하는 나. 

꼬시는 건 난데, 꼬셔지는 사람보다 더 크게 심장이 뛰는 나였다. 


그 진짜 그런 노래가 있어? 한국 노래라고? 

솔티 응 이 노래 제목이 뭔지 알아? 실용 스페인어야. 근데 하나도 안 실용적잖아 그래서 너무 웃기지 않아?

그 되게 시같다. 나 그 노래 너무 좋아! 


그는 wow.. i love it 을 중얼거리다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바 쪽을 멍하니 보다가 자기의 손을 슥슥 허벅지에 닦고서는 '이름이 뭐야, 스페인에는 언제왔고, 그라나다 에는 언제왔어, 누구랑 왔어, 마드리드는 어땠어' 라고 물어볼 때처럼 내게 물었다.


너는 해변에서 키스해본 적 있어? 언제 해봤어? 한국 바다였어? 스페인 바다였어? 로맨틱 했어?

나는 그에게 Sure. 전남자친구랑 해봤지, 한국 바다였어, 로맨틱 했지 왜냐면 난 걔 사랑했었으니까. 

지금은 다 과거지만. 그 순간을 사랑했어 라고 대답했다. 


내가 그 대답을 하는 동안 그는 책을 읽을 때와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기도 했다. 내가 대답을 마치니 그는 내게 물었다.


이안 스페인에서 키스해본 적 있어?

솔티 아니 아직 없어



.

.

.


노래 [실용 스페인어] 는 실용적이었고, 

나는 이제 스페인에서 키스를 해본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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