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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도 황희두 Nov 03. 2018

<므두셀라 증후군, 그 악마의 속삭임>

누구나 과거의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딱히 우울하지도 않고 오히려 행복에 가까운 일상을 보내던 중, 오래전 좋아하던 노래가 흘러나오거나 문득 과거의 어떤 순간이 떠올라 행복하던 감정이 갑작스레 그리움으로 가득 차면서 우울함으로 변해버린 그런 날 말이다.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어루만지며...


참 아이러니하다.

분명 머릿속에 떠오른 과거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 과거는 대부분 행복했던 순간으로 다가온다. 이를 보면 마치 기억이라는 악마 같은 녀석이 모든 걸 왜곡시켰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면 대부분 학창 시절에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교복을 벗어던진 채 얼른 자유를 만끽하고 싶고, 대학교 캠퍼스의 낭만을 누린다거나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돈을 번다거나…. 시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기에 누구나 지옥 같던 학창 시절에서 결국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자유의 기쁨은 잠시, 대부분 그 자유가 또 다른 구속을 의미했음을 깨닫고는 금세 불안함을 느끼며 후회하곤 한다.


'내가 이러려고 어른이 되고 싶어 했나..'


하지만 아무리 자괴감에 빠져본들 소용없다. 이미 과거는 야속하게 멀어져 가고, 눈 앞에 놓인 것은 현재와 미래뿐이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그립다.. 그땐 순수했는데. 사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당시엔 벗어나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과거에 이상하리만큼 덤덤해진 나,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는 본인을 자각하면 스스로 그만큼 성숙해진 건지 아니면 기억이 왜곡된 사실을 속삭이는 건지는 도무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것은 나만의 고충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요 오랜 사색과 냉철한 분석으로 알려진 수많은 철학자들 또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이를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라고 부른다. 추억은 항상 아름답다며 좋은 기억만 남겨두려는 심리를 말한다. 과거 중에서 나쁜 기억은 지우거나 희석시키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는 '기억 왜곡현상'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에 등장했다는 걸 보면 수천 년 전부터 모든 인간은 이런 악마의 속삭임을 느꼈나 보다.


이처럼 개인의 작은 일상 속에선 이러한 악마의 속삭임을 애교처럼 넘겨버려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국가 차원으로 끌고 와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니 무서워진다. 자칫 하다간 과거 독재 시절의 무자비한 폭력과 공포마저도 전부 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하는 악마는 절대 애교로 넘겨선 안 된다.


민주화 이전 우리나라의 미래가 암담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국민의 인권은 군화에 처참히 짓밟히고, 새마을을 만들겠다며 오로지 성장에만 급급하던 지난 날들... 불과 몇 년 전에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경제를 살린다더니 대운하 파기에만 급급하던 한 장사꾼과, 남이 적어주는 연설문을 읽으며 '혼이 비정상' 같은 샤머니즘적 언어만 외쳐대던 한 허수아비가 국가를 통치하던 시절을 우리는 직접 경험했다. 당시 정말 극단적인 보수세력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결국 정권은 교체됐고 그 암울했던 시절 모두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므두셀라 증후군, 즉 악마의 속삭임이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악마가 등장해 이렇게 속삭인다. '그 시절이 그립지 않니? 잘 생각해봐. 그땐 행복했을걸?'이라며. 급기야 그 시절을 증오하던 수많은 사람들마저 악마의 속삭임에 빠진 채 "그때가 훨씬 살만했다"라며 과거를 미화하기 시작했다.


그 몹쓸 악마가 도대체 얼마나 깊이 침투했길래 이런 말들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전부 '악마의 속삭임'에 의해 왜곡된 기억임을 망각하고 있다.


현실이 힘들면 과거를 미화하며 힘든 시기를 극복하는 건 좋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또한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오래전 '군부 독재'와 '국가의 사유화' 같은 범죄 행위마저 미화해선 절대 안 된다. 아무리 능력 있고 청렴결백한 사람들이 국가를 통치하더라도 그때마다 찾아오는 '과거 미화의 속삭임'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국가의 좋은 기억들은 그대로 간직하되, 아프고 분노해야만 하는 기억들은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습관을 들여보면 어떨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어떠한 왜곡된 기억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하고 또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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