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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뷰 Jun 16. 2016

스펙같은소리하고있네

[내친구의생애사③] 대학을 중퇴했지만, 소박한 꿈을 꾸는 L의 이야기

청년을 다루는 수많은 기사들,
틀 하나를 먼저 정해 놓고, 그 틀에 맞는 청년들을 찾아서 끼워맞추기 바쁩니다.
우리는 순서를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예전에는 '친구'이기만 했던 그를 '청년'으로 바라보며,
내 바로 옆에 있는 그 청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청년view가 만난 우리 시대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내 친구들의 생애사를 소개합니다.


좋아하는 음식 : 된장찌개, 김치찌개

연관검색어: #집좀들어가 #맥주한잔 #식자재



부모님의 반대, 뒤집힌 인생


많은 청년들에게는 꿈이 있다. 나 역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한 번 정해진 꿈은 포기하기 쉽지 않다. 자신이 결정하고 다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 L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꿈을 포기했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다. 


L은 어린 시절부터 힘이 세고 고집이 있는 아이었다. 중학생 때는 흔히 말하는 '노는 애들'과 어울렸다. L의 수업태도를 지적하는 선생님에게 '수업이나 똑바로 하시라'고 대든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랬던 과거를 후회하게 됐지만 '대쪽같은' 고집은 여전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몇 번이고 바꾸는 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꿈은, 오랫동안 오직 건축가였다. 대학 원서도 그러한 꿈에 맞춰 적었고 그는 4년제 건축학과에 합격했다. 그래서 L도, L의 주변사람들도 그가 그답게, 고집스럽게 건축가의 길을 걸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L은 이미 합격했던 4년제 건축학과가 아니라, 전문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노인, 어린이, 장애인을 도와주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기에, 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우리 고3때 복지사업이 엄청난 이슈였잖아. 지방대 건축학과 나와서 건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건축보다는 사회복지라 해서 취직 잘되는 전문대에다가 유망학과인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어. 부모님이 원하잖아. 부모님 마음을 헤집어 놓고 내 꿈만 따라가면서, 부모님에게 실망감을 주기 싫었어."


그렇게 스무살의 L은 사회복지학과 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된 대학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언제까지 붙어 살순 없잖아


어느 날 집에 오니 할머니가 와 계셨다. 잠깐 들르신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뇌졸중이셨다. 할머니는 8개월간 치료를 받으셨다. 원래 L의 집은 부자까진 아니지만 꽤 형편이 넉넉했다. 평수가 넓은 아파트에 살며 외제차를 타시는 아버지의 외벌이로도 가계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할머니가 병치레를 하는 날이 길어지는만큼 가족의 생계는 어려워졌고, 웃는 날이 줄어들었다. 


이런 경험 속에서 L의 인생관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의 돈을 받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번 돈이 아니고 부모님이나 남이 준 돈은 막 쓰게 되서 내가 벌어서 내가 쓰기로 했어. 내 맘도 불편하고 그럴 바에는, 내가 힘들게 벌어서 편하게 쓰려고. 조금이라도 모아서 빨리 독립을 해야지 언제까지 부모님께 붙어 살 수는 없잖아."


스무살이 되고 L의 삶은 자발적인 포기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건축가라는 꿈을 포기했고, 부모님에게 돈을 받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는 또 하나, 대학을 포기했다. 스물셋에 제대하고 나서 복학을 하지 않았다. L은 복학하지 않은 이유가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이 잘 맞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좀 더 빨리 돈을 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L은 아버지가 일하시는 식자재 물류센터에 관심이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그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식자재 센터 냉장 팀에서 몸을 쓰는 일을 하고, 낮에 잠을 잤다. 편하게 용돈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고된 길을 택한 것이다.


"새벽에 일하는 건 고3 때 너네랑 밤새 게임해서 익숙해. 그 덕 좀 봤지." (웃음)


열심히 일하던 L은 잠시 일을 쉬고 있다. 군대에서 걸린 피부병 때문에 입원 치료를 받고 지금은 집에 누워 있다. 의사는 적어도 한 달 입원해야 한다지만 그는 빨리 퇴원하려 한다. 재발률이 높은 병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려한다. 남들은 이렇게 된 거 쉬라고 하지만 돈을 벌어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려면 멈춰 있을 여유가 없다.



인터뷰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



다시, 소박한 꿈을 꾸다


요새 L에게는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큰 꿈이 아니다. 바로 슈퍼마켓 주인이다.


"사람이 사는데 의식주가 필요하고, 내가 식자재 센터에서 일하니까 그 중에 식(食)을 맡고 있는 거잖아. 내가 새벽에 일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보람이 있더라고."


슈퍼마켓을 차려서 사람들의 식생활의 '시작과 끝'을 책임져보고 싶다는 게 그의 새로운 꿈이다. L의 선택은 남들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일지도 모른다. 마치 '-사'로 끝나는 직업이거나, 대기업 직원, 적어도 공무원은 되어야 청년들이 꿀만한 꿈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 아니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개성이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스펙을 쌓고, 똑같은 자기소개서를, 똑같은 공식에 맞춰 쓰는 것은 '꿀만한 꿈'이라고 인정되는, 청년에게 허락된 미래가 너무나 한정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L은 모두가 대학졸업장을 따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이 이야기하는 이 사회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것도, 식자재센터에서 일하는 것도, 남들은 무시할 수 있겠지만 상관 없어. 대학을 나오던 나오지 않던, 사람 자체가 중요하지 스펙 자체가 중요 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대학졸업장은 사회가 강요하는 것 같아. 사회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


L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100% 본인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지금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선택들로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꿈과 새로운 행복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행복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있다면 그건 그가 건축가라는 그의 꿈을 포기했기 때문도 아니고, 대학을 그만뒀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일을 하느라 친구들과 여행을 갈 수 없는 것이 조금 슬플 뿐.


"난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면 돼. 꼭 고위층으로 살 필요도 없어.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행복은 그냥 그 사람이 잘 웃는 거고. 아무리 남들에게 비싼 차 보여줄 수 있어도 외롭고 불행하면 그건 성공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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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23년 인생을 참 굴곡 있게 살았다고 호탕하게 웃는 L을 보며 나 또한 내 꿈을 한 번 더 곱씹어본다.



청정넷-기자단 청년view [내친구의생애사] 인터뷰 연재
: 글/사진. 이도영 기자 (arspps2@gmail.com)
: 편집. 김선기 (fermata@goham20.com)
: 일러스트. 허지나 (raptyw@naver.com)
: 문의. 이성휘(seoulyouth20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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