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던 여행지를 다시 간다는 것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by 유라

동네를 거닐며 산책을 하다 해가 느긋이 지고있다.

벌써 만보 이상을 훌쩍 넘게 걸은 것 같은데 튼튼한 신발 덕택인지 발걸음이 아직 상쾌하다.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우울했다 슬펐다 행복했다 설렜다 기대했다 적적했다 온갖 형용사를 반복하는 내 마음에 괜시리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우린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타인에 의해 조정받아 왔던가.

여행지에서는, 특히 혼자라는 이곳에서는 내 하루의 주인이 홀로 나였다. 길거리 집앞에 내놓은 화초의 정갈함에도 기우뚱 기분이 들뜨고, '안녕'해주는 외국의 꼬마아이들에게도 눈짓만으로 마음이 벅차오르고, 허름해보이는 노점상에서 눈치보지않고 아무 음식이나 시켜 먹어볼 수 있을 때 오는 알쏭달쏭함 까지. 하루종일 나를 대접하고 내가 무얼하고 싶은지 무얼 먹고 싶은지에 관심가져주는 내가 있을 수 있다.


이야, 이런 감성이 나오는 오늘의 이런 날이라면 맥주 한 잔 살짝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에 가보았던 강변의 펍으로 향했다. 감자튀김과 생맥주를 시키고 가게의 2층에 자리를 잡았다. 특이한 구조의 이곳은 푸드트럭같은 곳인데 1층에는 주인이 음식을 하고 주문을 받고, 자리는 그 위로 올라가야 있다. 나름의 루프탑 구조라고 해도 될까? 아무튼 아기자기 한 작은 2층 미니트럭들이 강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제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황색 불빛의 전구를 줄줄이 달고. -나는 감성의 완성은 조명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주황빛 조명!-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사람이 많지 않아 역시 따뜻하게 입고와 날도 잘 고른 나를 한번 토닥토닥 해준다. '최고야. 잘했어. 최고의 밤이 될거야.'


짭쪼름한 감자튀김을 케챱에 찍어먹고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소금을 잔뜩 친 감자튀김에 설탕 잔뜩 넣은 케챱의 조화라니. 단짠단짠의 훌륭한 콤비에 마무리는 알코올이 녹아있는 탄산음료로 꿀꺽. 부어있던 다리가 사르르 풀리며 그제야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까만 강.

나는 사실 이 곳이 처음이 아니다.

날을 지나간 옛 연인과도 왔었고,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와도 왔었다.

누가 강이라고, 낮에는 누구보다 푸르게 빛나고있는 푸른강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알지 못할 것 같은 새까만 강이 오늘따라 제 모습 감추려는 듯 더 잔잔히 흐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저 새카만 속내를 누가알아!' 하며 새까만 흉을 본다.

그런데 까맣다는 게 마냥 숨긴다는 것일까?

건물의 불빛, 가로수의 불빛, 다리의 형형색색의 불빛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트럭의 장난감같은 주황불빛까지 빠짐없이 머금고 있는 성실한 까만 강을 보고 괜시리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변호해달라 한 적 없는데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까만게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서 까말수 있다.

받아주고 머금고 싶어서 까말 수 있다.

밤하늘의 별에 사람들이 열광하듯, 누군가를 빛나게 해주고 싶어서 까말 수 있다.


갑자기 까만강에 몰두하다보니 내마음은 검정인지 하얀색인지 아님 그 중간의 어느 색인지 궁금해졌다.


-

십분 정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 마음이 까맘인지 하얌인지 아님 그 중간의 어디쯤인지, 나와 함께 이곳에 왔던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친구와 하하호호 떠들며 관광지 앞에서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여행을 했었다. 사랑하는 이와 하하호호 떠들며 관광지 앞에서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여행을 했었다. 가봤던 여행지를 다시 간다는 것은 추억을 좇는 것일까. 추억을 입히는 것일까.




가만히 앉아 까맣게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만, 그런데 내가 저 강이 까맣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가.


가봤던 여행지를 다시 간다는 것은 놓쳐버렸던 풍경을 남기는 것인가.

사람이 소중한 여행을 하면 풍경보다는 사람을 남긴다. 너와 왔었던 이년 전의 이곳은 너와의 사진이 가득했다. 강이 까맣든 파랗든 너와 오늘 하루의 추억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지. 맥주잔을 부딪히며 로맨틱한 저녁노을 멋드러지게 보여주는 강을 핑계삼아 사랑을 속삭였을테지.



소중한 사람의 잔상이 남겨진 여행지를 오면 풍경을 덧입힐 수 있다.

까만 캔버스지에 너와의 기억을 담는다. 그리고 그 위에 나를 덧칠한다.

같은 풍경에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수히 많았음을.



그것에 위로를 받고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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