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지연 Aug 22. 2019

로또부터 사고 시작하자.

나의 오컬트한 일상


“로또부터 사고 시작하자.”

얼마 전에 나는 언니들과 만나자마자 다 같이 로또를 사러 갔다. 로또 판매점이라는 검색 키워드를 넣어보니, 역 8번 출구 가판대가 로또 명당이라고 했다.


로또를 몇 번 사본 적이 없었던 나는 휘둥그레한 장면을 보았다. 와, 로또도 이렇게 줄을 서서 사는구나. 작은 가게 앞에 사람들이 무슨 입장권을 사듯 일렬로 쭉 서 있었다. 로또만 되면 여기 아닌 어딘가로 갈 수도 있으니, 어쩌면 이것 또한 어딘가로의 입장권일 수 있겠다 싶었다.


세워둔 샛노랑 판넬에는 ‘로또명당 1등 9번, 2등 37번’이라는 희망적인 문구가 큼지막히 써 있었다. 판넬에 새겨진 숫자 위에 다시 여러 번 숫자를 새로 종이에 인쇄해서 여러 번 붙여둔 것은, 당첨이 바로 얼마 전에도 따끈따끈하게 있었다는 묘한 신뢰감을 주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운이 혹시 이 명당에서 나에게도 올지 모른다는 부풀어오르는 마음도.


줄을 지어 로또를 사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언니들과 나의 대화 주제는 어느덧 부동산으로, 청약으로, 집값으로 흘러갔다. 우리 생애 집 하나를 갖기 위해 몇십 년을 은행 노예로 살 것인지, 그렇게 아둥바둥 살다가 내일 당장 죽으면 뭐가 남는지와 같은 건 말하기에도 입이 아팠다.


“그래, 결국에 로또만이 답이야.”
“맞아, 로또만이 살 길!”
“로또 사는 것도 꾸준함이 중요해.”
“우리 중에 한 명이라도 로또 되면 어떻게 할래?”
“뉴욕여행 쏘자.”
“콜!!!”


당장이라도 비행기 예약을 하고, 뉴욕의 거리를 함께 거니는 단꿈을 꾸며 우리는 낄낄댔다. 꿈꾸는 건 자유니까. 혹시 또 모르지, 정말 당장 뉴욕에 갈지도.


단꿈을 꾸며 우리는 낄낄댔다. 꿈꾸는건 자유니까.



로또, 명당, 타로, 사주, 풍수지리, 별자리 등은 아득하고 막막한 일상 속에 쏘아 올린 공처럼 작은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


전 세계 상위 26명의 재산이 하위 38’억’명의 재산과 맞먹다는데. 그런 뭐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질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 사소하게 하고싶은 것들이 거창한 사치로움이 되지 않게, 더 이상 다음이나 나중으로 유예하며 살고싶지 않은 꿈.


산 너머 산, 스테이지 너머 스테이지, 문 뒤의 또 문 같은 일상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걸 지금보다 아주 조금은 덜 힘들게, 조금이라도 가뿐하게 넘길 것 같은 환상. 개인이 뭘 잘못하거나 노력을 더 해야 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하며, 그러므로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 운과 요행에 기대어보는 안도감.



더 이상 다음이나 나중으로 유예하며 살고싶지 않은 꿈



너무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거, 사력을 다하는 그런거는 이제 좀 그만하고 그만 봤으면 좋겠을 때. 적당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아니 어쩔 땐 그냥 다 망했으면 좋겠다고 내려놓고싶을 때. 뭐든 전부도 아니고 다 일부일 뿐이니까 그렇게까지 중요한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때. 아니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정말 중요한가요? 묻고 싶을 때. 함께 여유롭게 다 같이 누릴 수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을 때. 그리고 거창한 것 좀 누리면 안 되는지, 맨날 소소하고 작은 것이나 희망하는 소시민 같은 소확행. 이런 단어 자체도 듣기도 싫을 때.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내 탓이 아니라 사회탓구조탓 그것도 생각하기 머리 아프면 그냥 이 모든 게 다 운 때문이라고 돌리고 싶을 때.


<나의 오컬트한 일상>을 보며 잠시 쉬어도 좋겠다.

“It’s not your fault.”니까.



“It’s not your fault.”니까.






운명론과 오컬트적 풍수설에는 나의 행동이 아닌 다른 제삼의 힘에 원인을 돌리는 편안함이 있었다. 이런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달 동안 나를 책망해 온, 그리고 무관심한 타인을 살며시 원망하느라 지친 나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 박현주, <나의 오컬트한 일상> 33p.




글 성지연  /  사진 Andria Darius Pancrazi


<나의 오컬트한 일상>을 읽고, “나의 오컬트한 일상”에 대해 썼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주, 라는 한 단어만으로도 시처럼 느껴지는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