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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연 Aug 22. 2019

여전히 나는 좋을 것이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문장이 모이면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이면 한 편의 글이 된다.”
결국의 글은 여러 문장들이 모인 결과인데, 문득 책을 읽는다는 것을 결국에 글 속 단 하나의 문장과 깊숙이 조우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라는 책의 제목처럼.




결국에 글 속 단 하나의 문장과 깊숙이 조우하는 과정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나는 3월을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억지로 작은 한 공간에 등 떠밀려 들어가, 또 억지로 그곳에 적응하려고 애써야 하는 달이었다. 낯선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새로운 사람과도 친해지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그런 나의 속도를 좀 채 기다려주지 않는 달. 애써 빨리 스며들지 않아도 되고, 서둘러 속하지 않아도 되며,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는 것도 괜찮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달. 얼마 안 되는 새로움은 금세 지긋지긋해지고, 불안하면서도 막상 쫓기듯 적응하기에 바삐 흘러가는 달이었다.




애써 빨리 스며들지 않아도 되고, 서둘러 속하지 않아도 되며,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는 것도 괜찮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달.



그런 3월에 내가 가장 기다리고 좋아했던 단 한 가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새 학기의 국어 교과서였다. 국어 책을 받아오자마자 그 날 당장 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이라고 선물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일날 늘 받는 선물 또한 책이었다. 부모님께서 사주신 책을 열 번, 스무 번 넘게 읽고 또 읽었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를 진정으로 가장 나의 삶 속에서 열심히 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읽고 또 읽어도 재밌었고, 늘 짜릿하고 새로웠으며, 읽을 때마다 그 책은 같은 책이 아닌 다른 책이었다.




그런 3월에 내가 가장 기다리고 좋아했던 단 한 가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새 학기의 국어 교과서였다.




그래, 나는 책을 참 좋아했다.


길지 않은 인생의 변곡점 마다에도 늘 책이 있었다. 첫 번째 대학을 다니다가, 두 번째 대학으로 갈 수 있게 용기를 준 것도 책이었다. 제목이 끌려 아무렇게나 운명적으로 읽은 책을 보고 그제야 외면했던 마음에 직면하게 되어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첫 애인을 사귀기 전, 반하게 됐던 것도 첫 데이트 날 받았던 시집 한 권이었다. 그때에는 아니 이렇게 눈 나리는 날, 선물로 시집이라니. 와, 뭘 좀 아네? 생각했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여기가 아닌 곳이라면 그 어느 언저리엔가 라도 떠나고 싶을 때, 그럴 때에도 책을 읽었다. 책은 어느 곳으로든 금방 떠날 수 있게 해줬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 느낌들이 작가가 써 놓은 책의 단 한 문장으로 표현이 되어있을 때. 그래서 그 순간 책장을 덮고 멈추게 되는 순간들은 삶이 살 만하게 느껴지고 숨을 쉬게 해주었다.

지금은 어떨까,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책은 할 일들의 더미, 더미, 더미에 쌓여 치이는 중에 내가 시간을 내어 겨우 읽어야만 하는 또 다른 더미처럼 되어버렸다. 진정으로 책과 만날 준비와 마음을 열 여유가 전혀 없는데, 그 여유를 애써 만들어 겨우 겨우 읽어내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것. 책에 시간을 쏟느니, 한 숨이라도 더 자거나 멍을 때리는 것이 그나마 살 것 같은 것.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어야지 하고 가방 안에 넣어갔다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마구 치이다보면, 그 가방 속 책 한 권이 바닷속 잠긴 무쇠처럼 느껴져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책을 가져왔나 하게 되는 것. 그래도 또 읽고는 싶어서 서점에서 이 것 저 것 고르며 책을 사왔다가도, 책장에 꽂혀있는 그 책이 얼른 읽어! 또 사지 말고 이미 있는 것부터 읽어! 읽고 사! 하는 압박감으로 느껴지는 것. 그래서 심폐소생술처럼 독서 모임이라도 해야 책이라도 읽지 하며, 그래도 모임이라도 해서 책을 읽었다 안도하게 되는 것.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아니, 그럼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책이 좋다는 것이었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아니, 그럼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책이 좋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이 좋다. 책 속에 있는 단 하나의 그 문장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내가 다른 게 좋다. 책을 읽는 사람들, 책을 선물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책과 마음에 닿은 문장을 이야기하며 금방 달 뜬 얼굴을 하는 사람들이 좋다. 자신에게 있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꺼내어 문장을 짓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좋다. 한 권의 정해진 책을 끝까지 읽고, 그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시간을 내어 모이는 사람들이 좋다. 책을 읽는 순간에 그곳이 어디든 만날 수 있음이 좋다.


그래서 언젠가, 그 어느 때라도, 그것이 단 한 순간뿐이더라도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을, 읽는, 읽을’ 그 순간이 좋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좋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좋을 것이다.






글 성지연 / 그림 이정호 일러스트레이터 (www.leejungho.com)


허연,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를 읽고, 책에 대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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