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문장이 모이면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이면 한 편의 글이 된다.”
결국의 글은 여러 문장들이 모인 결과인데, 문득 책을 읽는다는 것을 결국에 글 속 단 하나의 문장과 깊숙이 조우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라는 책의 제목처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나는 3월을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억지로 작은 한 공간에 등 떠밀려 들어가, 또 억지로 그곳에 적응하려고 애써야 하는 달이었다. 낯선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새로운 사람과도 친해지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그런 나의 속도를 좀 채 기다려주지 않는 달. 애써 빨리 스며들지 않아도 되고, 서둘러 속하지 않아도 되며,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는 것도 괜찮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달. 얼마 안 되는 새로움은 금세 지긋지긋해지고, 불안하면서도 막상 쫓기듯 적응하기에 바삐 흘러가는 달이었다.
그런 3월에 내가 가장 기다리고 좋아했던 단 한 가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새 학기의 국어 교과서였다. 국어 책을 받아오자마자 그 날 당장 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이라고 선물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일날 늘 받는 선물 또한 책이었다. 부모님께서 사주신 책을 열 번, 스무 번 넘게 읽고 또 읽었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를 진정으로 가장 나의 삶 속에서 열심히 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읽고 또 읽어도 재밌었고, 늘 짜릿하고 새로웠으며, 읽을 때마다 그 책은 같은 책이 아닌 다른 책이었다.
그래, 나는 책을 참 좋아했다.
길지 않은 인생의 변곡점 마다에도 늘 책이 있었다. 첫 번째 대학을 다니다가, 두 번째 대학으로 갈 수 있게 용기를 준 것도 책이었다. 제목이 끌려 아무렇게나 운명적으로 읽은 책을 보고 그제야 외면했던 마음에 직면하게 되어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첫 애인을 사귀기 전, 반하게 됐던 것도 첫 데이트 날 받았던 시집 한 권이었다. 그때에는 아니 이렇게 눈 나리는 날, 선물로 시집이라니. 와, 뭘 좀 아네? 생각했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여기가 아닌 곳이라면 그 어느 언저리엔가 라도 떠나고 싶을 때, 그럴 때에도 책을 읽었다. 책은 어느 곳으로든 금방 떠날 수 있게 해줬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 느낌들이 작가가 써 놓은 책의 단 한 문장으로 표현이 되어있을 때. 그래서 그 순간 책장을 덮고 멈추게 되는 순간들은 삶이 살 만하게 느껴지고 숨을 쉬게 해주었다.
지금은 어떨까,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책은 할 일들의 더미, 더미, 더미에 쌓여 치이는 중에 내가 시간을 내어 겨우 읽어야만 하는 또 다른 더미처럼 되어버렸다. 진정으로 책과 만날 준비와 마음을 열 여유가 전혀 없는데, 그 여유를 애써 만들어 겨우 겨우 읽어내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것. 책에 시간을 쏟느니, 한 숨이라도 더 자거나 멍을 때리는 것이 그나마 살 것 같은 것.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어야지 하고 가방 안에 넣어갔다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마구 치이다보면, 그 가방 속 책 한 권이 바닷속 잠긴 무쇠처럼 느껴져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책을 가져왔나 하게 되는 것. 그래도 또 읽고는 싶어서 서점에서 이 것 저 것 고르며 책을 사왔다가도, 책장에 꽂혀있는 그 책이 얼른 읽어! 또 사지 말고 이미 있는 것부터 읽어! 읽고 사! 하는 압박감으로 느껴지는 것. 그래서 심폐소생술처럼 독서 모임이라도 해야 책이라도 읽지 하며, 그래도 모임이라도 해서 책을 읽었다 안도하게 되는 것.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아니, 그럼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책이 좋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이 좋다. 책 속에 있는 단 하나의 그 문장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내가 다른 게 좋다. 책을 읽는 사람들, 책을 선물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책과 마음에 닿은 문장을 이야기하며 금방 달 뜬 얼굴을 하는 사람들이 좋다. 자신에게 있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꺼내어 문장을 짓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좋다. 한 권의 정해진 책을 끝까지 읽고, 그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시간을 내어 모이는 사람들이 좋다. 책을 읽는 순간에 그곳이 어디든 만날 수 있음이 좋다.
그래서 언젠가, 그 어느 때라도, 그것이 단 한 순간뿐이더라도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을, 읽는, 읽을’ 그 순간이 좋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좋을 것이다.
글 성지연 / 그림 이정호 일러스트레이터 (www.leejungho.com)
허연,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를 읽고, 책에 대해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