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매년 오월, 이 맘 때쯤이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오색찬란한 꽃들보다 갖 피어난 연두잎에서 나는 초록초록한 내음과 물결들이 나기 시작하는 이 계절을, 이 5월의 밤들을 정말 무척이나 사랑하는데.
그 장면이 떠오를 때면, 이미 떠올려버리고 말았을 때면 어떤 면에선 가슴 저리게 애틋하게 그립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애달프고 슬프고 고통스럽다. 때로는 그 고통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정말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그렇다.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난대로 계속하고 또 계속하면 언젠가는 지겨워서 더 이상 안 나겠지 한 적이 있다.
ㅡ그러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알지도 못할 거야. 내가 생각을 하는 만큼 반의 반의 반보다도 그가 할 것 같아? 의미 없으니 그만 하자.
ㅡ그러지 못했다.
이 생각 정말 많이 미화된 거야. 예전에 써두었던 일기를 보고 외면했던 것들을 직면하고 똑바로 보자. 그리고 그만 하자.
ㅡ그러지 못했다.
나쁜 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진짜 나쁜 새끼야. 그러니까 이제 진짜 그만 하자.
ㅡ아니, 그러지 못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 그 시절도 그 사람도 아니라 그냥 시절의 나일 뿐이야.
ㅡ알면서, 그러지 못했다.
언제나 생각은 이미 나 버렸다.
생각이 나버린 후에 멈추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생각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벌써 생각은 나버렸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에 대한 태도를 설정하는 것뿐이다.
계속 더 많이, 더 넓게, 더 깊게 생각해버리거나
또는 생각이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없었던 것처럼 부정하거나
참 빛나고 아름다웠다고 그리워하거나
또는 아픈 기억들을 동시에 꺼내어 상처가 났던 자리를 들여다보거나
이게 다
여전한 사랑인가, 미련인가, 애증인가, 미움인가,
그저 그 때 그랬지 하는 그리움인가,
미화된 과거인가 습관인가
계절에 각인돼버린 기억인가
만족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반증인가
아니 이게 다
도대체 뭔가 했는데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고 나니
어쩌면
이것도
그래 어쩌면
그저 단순한 열정이라고 치부해도 될 것도 같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65p.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66p.
아니 에르노가 말했듯
그 끊임없이 무한한 멈추지 않는 생각들은 그 때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 온 단어들이며,
그래서 그 생각은 그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이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여기고 나니 조금 단순해지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생각은 그냥 생각이라고.
머무르면 머무는 대로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그래서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나는 대로
그렇게 무엇이든 다 해도
너무나 좋은 오월, 오월의 밤이니까.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을 읽고 오월의 밤에 대해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