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영화 <어느 가족>에서 ‘다들 고마웠어.’ 입 모양으로만 말한 대사는 키키 키린 배우가 즉흥적으로 했었던 것을 편집 과정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시나리오를 수정했다고 한다.
그 일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참 따뜻하고 좋은 연기를 해주셨던 키키 키린 배우다운 대사도 좋고, 그것을 영화에 그대로 담은 고레에다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느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에서도 그가 지닌 철학, 신념, 정서들이 여러 일화에서 그대로 묻어져 나와 참 좋았다.
특히 가장 근사했던 이야기는 <환상의 빛> GV에서 있었다는 일화였다. 한 여성이 “어디서부터가 꿈인 것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통역자가 고레에다 감독에게 전달하는 동안 다른 관객이 이야기하고, 또 다른 관객이 이어서 이야기하다 감독이 끼어들려고 하니 “감독님의 의견은 잠시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하여 모두가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일. 고레에다 감독은 이런 분에 넘치는 시간이 또 있을까 기다리며 작품을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참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고 근사했다.
최근 직장에서 계속 끊임없이 협의를 하되 (여기서 회의는 답이 정해져 있는 회의,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정해진 답으로 유도하는 회의,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아주 민주적인 절차를 걸쳐 의견 수렴했다는 ‘근거’만을 남겨놓으려는, 속은 빈 강정 비민주주의면서 무늬만 민주적인 회의를 말한다.)
상사가 원하는 ‘답정너’가 안 나오면 그 답이 맞추어 나올 때까지 쥐어짜거나, 각자의 다른 생각을 공격과 도전으로 받아들이거나, 정 안되면 결국 마지막 결정을 상사 본인이 원했던 것으로 바꿔버리거나
(아니 그럼 처음부터 통보를 하지, 회의를 왜 했지?) 하는 일들이 올해 내내 계속 겹치고 겹쳐 켜켜이 쌓여 너무 스트레스였다.
마치 주관형 전혀 없는 객관형 문항에 이미 각각의 해당 번호마다 답을 새까맣게 칠한 OMR카드를 주고 너는 이름만 써서 제출하라는 느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까라면 까, 입에 재갈 물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들. 아니, 그러면 대놓고 하든가, 겉으로는 (문서상으로는) 민주적인 ‘척’ 하면서, 비민주의적인 과정과 절차가 판치는 게 너무나도 군부독재시대만큼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고레에다 감독이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 않겠다.”라는 이야기에 큰 희열을 느꼈고, “영화 속의 말과 움직임을 배우와 함께 발견하는 것이 나의 연출”이라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좋은 영화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에 대한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넘치게 하는 영화다. 누군가와 어떤 작품을 같이 감상하고 다양한 물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들은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만큼이나 예술적인 일이다.
또한 함께 일을 할 때 서로의 다른 생각을 나누어 조율하는 과정은 비록 고단하더라도, 어떤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그 과정 자체로 이미 의미가 있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지고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걷는 듯 천천히. 우리들의, 이 시대의, 각자의 것을 무엇이든 함께 만들고 나누면서 낄낄대다 웃다 울다 걸으면 좋겠다.
언제든 어디서든 이런 말, 아무 말, 그 어떤 말이라도 함께.
프랑스 항구도시인 낭트의 영화제에서 있었던 일. “이 <환상의 빛>이라는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두 번씩 반복된다. 그리고 영화의 서두가 꿈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마지막 또한 당연히 꿈일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꿈인 것인가?” 이런 고도(!)의 질문을 한 것은 한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통역자가 이 질문을 내게 전달하는 동안, 다른 관객이 손을 들어 “저는 여기부터 꿈인 것 같아요”라고 마음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거기부터라고 생각해요.”라는 다른 목소리. 토론은 나를 내버려 둔 채 열띠게 진행됐습니다. 어떻게든 끼어들려 하니 처음에 질문했던 여성이 “감독님의 의견은 잠시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제시해 장내는 웃음바다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강렬한 GV ‘원 체험’.
이런 분에 넘치는 시간을 일본에서도 실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16년간(아홉 작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53-54p.
글 성지연 / 사진 영화 <어느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