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싫어하는 것은 자유인데, 표현하는 순간 차별이다.”
“여기서 표현이라는 것은 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표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해주는 말 중의 하나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자리와 모둠을 바꾸는데, 특정한 제지가 없다면 아이들은 좋고 싫음을 더욱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곤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 라는 말 속에서도, 찡그린 눈썹 미간 사이에서도, 혹은 쿵쿵거리는 발걸음이나, 한숨 속에서 그 적나라한 표현들이 잘 드러난다.
수업 중에서의 장면이 아니라면, 잘 보이지 않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는 이런 현상들이 더 두드러진다. 때문에 학기초부터 아이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학급 규칙을 함께 정하고, 수시 반복적으로 학습한다. ‘욕설, 폭력, 험담, 귓속말, 따돌림 금지’라는 말을 알림장에 반복적으로 적는다. 이와 더불어 허용적인 학급 분위기를 만든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특정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일부러 교사가 먼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크게 말하며 분위기를 조성하면, 아이들은 어느 순간 모델링하여따라하곤 한다. 물론 위에 있는 욕설, 폭력, 험담, 귓속말, 따돌림은 예외이다. 본인이 당하거나 목격한 경우, 곧장 신고하도록 한다. 남녀를 성별로 구분짓는 행동이라든가, 키 순으로 줄세우기를 한다든가, 외모에 대해 “예쁘다” 또는 “잘생겼다”는 평가가 담긴 표현을 삼가한다. 학교에서는 수시로 학교폭력예방교육, 문화다양성 교육, 장애이해교육, 친구사랑주간 등 다양한 창의적 체험활동과 교과 속에서 연계교육을 하며 배운다.
아이들은 ‘차별’에 대해서 더욱 직접적으로 와닿는 설명을 해주면 격분한다. 예를 들어, 옆 학교에서 만약 우리 학교 학생들만 특정 장소에 오지 말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 학교 학생들은 무조건 ‘싫다’ ‘냄새난다’ ‘안 보이는 곳에 있어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주변의 사회에서는 어떨까? 여러분은 ‘초딩’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것을 처음 배우는 사람을 말할 때 ‘O린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지? ‘노키즈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말랐다’ 또는 ‘너무 살쪘다’, ‘키가작다’ 또는 ‘키가 크다’ 등 외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어떤지? ‘남자가 되어서 왜 울어?’ ‘여자아이가 되어서 왜 이렇게 힘이 쎄?’ 등의 대해 성별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어떤지? 이에 대해 수시로 틈틈히 한참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내가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배우고 느낄 때가 많다. 이 어린이들이 자라서 클 세상은 조금은 덜 차별적일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때로 일상 속의 차별을 이야기하다가 고학년 아이들의 경우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서로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런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매우 차별적이기도 하지만, 정말 차별적이지 않기도 하다. 오히려 어른보다 더.
그렇다면 아이들과 교사로서 만나는 나는 어떨까? 나는 정말로 차별적이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는 그래도 차별을 싫어하고, 아이들에게 공정하게 대하려고 최선을 다 해 노력하며, 차별에 대해 정말 아이들만큼이나 격분하고 분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바로 선량한 차별주의자임을 이 책을 보고 느꼈다.
아이들과 나와의 관계에서는 당연히 교사가 권력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대할 때 내 마음 속의 차별이 아예 없었는가? 물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아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정말 부단히 열심히 애쓸뿐이다. 나야말로 내가 스쳐지나가듯 짓는 표정에서, 손길 한 번에서, 말 한마디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대놓고 하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영혼을 천천히 파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교사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30명 가까운 아이들에게서 어쩔 수 없이 인싸와 아싸, 주류와 소수자가 보일 때 어느 정도 선에서 개입하고, 어디까지 지켜보고, 어떻게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어떤 경계는 더 공고히 해주고, 어떻게 함께 학급 분위기를 만들어갈지가 정말, 정말 어렵다. 나 스스로 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아이들에게 차별의 경험을 최소한으로 느끼게 해주며, 차별적인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해 수업을 하고 가르치는 것이 부단히 어려운 일임을 해가 갈 수록 더 더욱 느낀다. 때로는 교실 안에서 아무리 열심히 나누어도, 가정에서 사회에서 끊임없는차별과 혐오를 맞닥뜨리면 소용이 없다고 느낀다. 심지어는 교사 스스로도 여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차별에 노출된다.
아이들과 만나는 교사 외의 다른 관계에서는 어떨까, 두 명만 있어도 정치가 발생한다고 했던가, 학교라는 공간도 여러 사람이 모이다보니 수많은 관계 맺음이 일어난다. 학생들 사이의 관계, 교사인 나와 학생 사이의 관계 외에도 보호자 개별과 나와의 관계, 보호자 다수와 교사의 관계, 동료교사들과 나와의 관계, 학년부장이나 기능부장과 계원교사와의 관계, 관리자와 교사들과의 관계. 이들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권력적 관계 맺음이 중첩적이며 복합적으로 다면적으로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교사인 나와 다른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 교육부, 교육청, 학교라는 교육기관과 보호자 아래에서 교사는 철저히 소수자라고 느낀다. 민원에 벌벌 떨며, 교사 개인은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관리자와 학교 공간에서 교사는 처절하게 단 한 명의 소수자이다. 여성이 많은 여초집단으로서의 초등교사가 돌봄의 영역까지도 특정 수당 없이 일해야 함을 느낄 때 소수자라고 느낀다. 내가 하는 일에 비해서 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끊임없이 나에게 모멸감을 주고 좌절하게 한다. ‘교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 아닌, 돌봄이나 방과후의 일까지 해야만 하는 일이 서글프고 그 일들로 인해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이 등한시 되는 것이 화가 난다. 코로나 19 상황으로 인해 학교에서의 돌봄과 지역사회의 돌봄 문제가 더더욱 두드러질 때 주양육자를 넘어 독박육아가 많은 엄마(여성)와, 교육과 보육 역할 기대를 동시에 받는 여초집단인 교사(여성)가 계속주체가 되는 상황이 분노가 치민다. 이런 상황에서 헛발질하는 정책 입안자들의 성비들과, 사회 시스템 복지의 영역과 당연히 성별과 무관하게 해야 할 역할수행들을 자꾸 ‘여성 개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정책들이 너무도 답답하다.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도 고민했지만, 사회에서 ‘초등교사’라고 밝히는 게 싫다. 교사가 ‘여성이 많은 집단’이어서 사회적으로 자꾸 후려쳐지고, 특정 이미지로 덧 씌워지며, 약자인 아이들을 대하는 일을 전문성있게 여기지 않고 헐뜯고 깎아내리며, 과잉노동임에도 욕먹어오고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많다. 아동에 대한 혐오와 배제는 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결국 이런 아동을 대하는 직업인 사람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고, 이 문제는 여성으로서의 겪는 차별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
그렇다고 내가 차별을 받는 사람이기만 할까, 차별을 하는 사람일 수 있음과 동시에 차별을 받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 내가 바로 선량한 차별주의자였음을 스스로 자꾸 건드려지고 가슴이 두드려진다. 책을 읽으면서도 한 편으로 쾌청했지만 머릿 속이 복잡했다. 자발적인 선택 속에서 그 배경에 사회문화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할 수 있는 점과, 차별이 이렇게나 중첩적이고 세세하고 복잡하고 세밀한 것임을 다시금 느꼈다.
겸허히 고백한다. 나는 차별에 대해 잘 몰랐고, 차별을 해 왔다. 차별을 당해오기도 했으나, 내가 당하는 차별을 더 크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공감했다. 내가 차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 감히 생각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 ‘다양성을 마음 속 깊이 진정으로 인정’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고 내 이익에 반하거나 여러 이익이 충동할 때조차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쉽지 않은 일인지 생각했다. 시민 불복종의 매우 절실한 형태의 ‘말 걸기’를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선에서 적당하게 얕은 관심을 두고, 대부분은 무관심했다. 그것을 어느 정도는 ‘차별을 겪는 당사자들이 직접 처리해야 할, 남 일’이라고도 생각했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다고만 생각했지, 다른 범주로는 다수자나 경계 안의 사람으로서 차별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거의 깊이있게 생각을 못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려오면, 나는 복잡하게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고, 타인은 단순하게 나쁘게 차별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왔던 것이다.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리는 사람으로 환영받는 세상을 상상하자”라는 구절에서는 어쩐지 눈물이 났다.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공부하고 싶다. 차별에 대해 정말 잘 몰랐고, 앞으로도 잘 모를테지만 가까이에 가 닿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차별을 알게 모르게 해 왔으나, 끊임없이 배우려 노력할 것이다. 반성하고 성찰하고 되돌아볼 것이다. 타인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어떤시선에 의해서 판단짓고 규정지으려고 하려는 시선을 거두려 애쓸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환영받고 환영해주고 싶다.
나 스스로를, 당신을, 연결되어있는 서로를.
어울림의 공포는 성인이 되어도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의 경계 밖으로 내쳐지는 일은 두려운 일이고, 그 경계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걸 희생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 어울림의 공포와 싸우는 한가지 방안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소속되기 위해 ‘완벽한’ 사람이 되려 노력하거나 그런 사람인 척 가장하는 대신,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리는 사람으로 환영받는 세상을 상상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최소한 내가 배척당할까봐 두려워 다른 누군가를 비웃고 놀리고 짓밟는 일이 없도록, 넉넉하게 모두를 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를 꿈꾼다.
ㅡ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209p.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차별’에 대해 썼습니다.
글 성지연 / 그림 Jean-Jacques Sempé